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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준비

10월 16일 토요일, 이사를 가게 됐다. 2019년 12월부터 산 성북동 셰어하우스가 공원 조성으로 인해 철거가 된다. 17살에 태어나서 쭉 살던 집을 떠나 고등학교 기숙사에 들어간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번도 한 공간에서 2년을 살아본 적이 없다. 그나마 이 셰어하우스가 1년 10개월 정도로 최장기간 거주한 곳이다. 이사가는 곳은 성북구-서울시-SH가 철거세입자에 대한 특별공급으로 제공해준 임대아파트다. 철거되는 건물이 내 건물이 아니고 그냥 세입자일 뿐이지만 그래도 좋은 조건에 살고 있었는데 지자체의 공원조성사업으로 인해 집이 철거되어 어쩔 수 없이 살던 집을 떠나야하는 것에 대해 보상을 받게 되어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사비용과 주거지원금으로 얼마간의 돈도 받을 예정(좀 아이러니하지만 이사를 간 뒤..

일상/2020~2022 2021.10.09

준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오늘은 재인이 준 당근포타쥬로 아침을 시작하고, 재인이 준 초코휘낭시에를 요가가 끝난 후에 하나, 점심 먹고 나서 하나 먹었다. 진한 초코향이 어제 같이 먹은 스쿠퍼의 젤라또 초코맛이 생각나기도 하고, 정말 맛있었다. 저녁은 재인이 준 당근페스토로 파스타를 해먹었다. 하루종일 재인의 사랑을 먹은 날이었다. 어제 얘기하다가 그동안 몇 번 비슷한 대화를 반복해왔기에 알게된 것은, 재인은 본인이 내게 준 것들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뭔가를 바라고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저녁에도 다시 한번, 정말로 주면서도 무엇도 바라지 않는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자신이 준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참 다정한 일처럼 느껴진다. 대개는 받은 것은 잊어버리고 내가 해준 것..

일상/2020~2022 2021.10.05

그럴 리가 있나

어제 상담 속의 한 장면 내가 습관적으로 또 이런 종류의 말을 내뱉었다. "어휴~ 그땐 정말 제가 대책이 없었죠." 흔히 이런 말은 농담으로, 웃으며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정색하며 즉각 반박했다. 그렇지 않다고. 대책이 없었던 게 아니지 않냐고. 다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했던 거 아니냐고. 그건 용기있는 선택이었고 대단한 일이라고. 내가 인식하고 바라보는 나 자신의 과거와 경험들에 대한 체감온도가 몇도쯤 쑥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어쩐지 내가 살아온 그동안의 삶이 조금 더 따뜻했다고 느껴지는 것 같은 느낌. 다시 생각해봐도 내가 되도록 남의 인생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고 아주 조심하듯이, 내 인생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아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누군가가 던지는 위로와 ..

일상/2020~2022 2021.10.03

심리상담 3 - 5

어제 5회기 상담에 갔다. 몸이 좋지 않아서 상담을 취소할까 고민했었다. 그 장소까지 갈 수 없을 정도로 아픈 건 아니었지만, 먹은 게 없어 에너지가 별로 없고 머리가 무거워서 과연 정말 깊은 대화를 나누거나 뭔가를 잘 배울 수 있는 상태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선생님도 원래 그림을 그리기로 했던 예정을 바꾸어서 하고싶은 이야기들을 나누는 게 낫겠다고 하셨다. 좀 피곤해보인다고. 나 역시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해석하는 과정을 하기에는 에너지가 좀 부족한 것 같아서 좋다고 했고 그렇게 했다. 정리를 해가지 않아서 두서가 없었지만 겪게 된 갈등의 시작과 진행과 각 순간마다 내가 느꼈던 감정이나 들었던 생각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떤 순간에 내가 스스로 어떤 마음인지 모르..

일상/심리상담 2021.10.03

속초여행

9월말, 속초 흐리고 비가 와도 아름다웠고 해가 뜨자 찬란했다. 함께한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는 느낌이 이렇게 기분좋은 것인지 몰랐다. 체하는 바람에 컨디션이 안좋고 머리가 아파서 어떤 글도 쓰기 어려웠는데, 이제 회복이 됐다. 오히려 그렇게 평소보다 더 약해진 상태에 있어보니까 내 의지가 전보다 더 단단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도 내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구나, 먼저 헤아릴 여유는 없지만 귀 기울일 수 있고 얼마간의 단호함을 유지할 수 있구나. 싸움을 하면 후회와 자책과 앙금이 남곤 했다. 좋은 싸움이라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관계에 갈등이 없을 수 없는데 잘 싸우는 방법을 모르니 이겨도 미안함과 후회와 자책이 남고 져도 앙금과 나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는 슬픔이 남았다. 그렇게 상..

일상/2020~2022 2021.10.03

심리상담 3 - 4

선생님께서 그동안 몸이 좋지 않으셔서 2주만에 만났다. 어떻게 지냈냐는 얘기에 할머니 얘길 꺼냈다가 그대로 가족사 이야기로 흘러갔다. 할머니는 7남매를 낳으셨고, 애기때 돌아가신 한 분을 제외하고 아들 셋, 딸 셋, 총 6남매를 키우셨는데, 큰 고모와 둘째 고모가 내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다. 아마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던 것 같다. 막내 고모는 살아계신데, 막내 고모의 남편(고모부)과 큰아들도 교통사고로 죽었다. 당시 같은 차의 뒷좌석에 타고 있었던 막내 고모와 둘째아들은 목숨을 건졌다. 내가 여섯 살일 때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내가 열일곱 살 때 할머니의 6남매 중 가장 막내인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때 할머니의 나이가 이미 여든여섯이셨다. 아버지는 단순히 막내 아들일 뿐 아니라, ..

일상/심리상담 2021.09.25

밤, 그리고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를 마저 읽으며 밤을 삶았다. 개구리님과 소금쟁이님께서 산밤을 잔뜩 보내주셨다. 몹시 감사하지만 게으른 사람에겐 약간 난감할 정도의 양! 삶아서 먹어보니 맛있었다. 내일 오전에 뵙는 심리상담 선생님께 뜬금없이 밤을 좋아하시는지 메시지를 보냈다. 서울에서 하루종일 컴퓨터 들여다보고 사느라 계절을 잘 못 느끼는데 봄이면 두릅을 보내주시고 가을이면 밤을 보내주시니 받을 때마다 늘 감동이다. 나는 뭐 드릴 것도 없고 뵈러 가지도 못하는데 큰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도 두릅은 미친듯이 먹고 밤은 좀 느릿느릿 먹는다. 하하하. 재인이 운영하는 팝업식당의 이름이 "채소의 계절"이다. 계절이라는 말이 들으면 들을수록 좋은 느낌이다. 지나야만 하는 그 모든 계절들을 온전히 지나와야만 채소든 과일이든 제 맛을 낼 수..

일상/2020~2022 2021.09.24

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

진정으로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대하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면 스스로 소중히 여기는 감각을 찾는 것조차 쉽지 않다. 단 한 사람이라도 내가 진짜로 소중한 사람이고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단단하게 믿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삶이, 어떤 시절들이, 고난과 역경과 아픔과 슬픔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결국 즐거운 이야기로 기억될 수 있는 거 아닐까.

일상/2020~2022 2021.09.24

모든 사랑은 특별했다

모든 사랑은 특별했다. 의식적으로도 모든 사랑, 모든 관계를 더 특별하게 여기려고,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땅히 그래야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랑을 특별하게 여겼던 내가 좋다. 그럼에도, 굳이 그러했던 당시의 감정들을 재인에게 보여줄 필요는 없었는데, 하는 후회가 잠깐 들었다. 그리고 올라오는 이 불안감은 트라우마적인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실수하고 싶지 않다, 단 한번의 실수로 관계가 틀어지게 만들고 싶지 않다, 라는 두려움이다. 자신에게 불편한 이야기를 꺼냈다는 이유로 기약도 없이 연락을 끊어버렸던, 그래서 내가 계속 "이렇게 끝인가?"하고 절망하길 반복했던 기억들이 있다. 초반의 연애들에서는 상대방을 바꾸려 들었다. 최근의 연애들에서는 나를..

일상/2020~2022 2021.09.21

결혼에 대해 했던 생각 - 2018년12월25일 페이스북

그동안 결혼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달라지는 걸까. 요즘 한 생각 중 하나는 결혼 후의 배우자와 나의 관계가 상상하기 어렵다면,(보통은 전혀 모른다) 상대방이 가족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는게 그나마 결혼 후를 현실적으로 예측해볼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하는 것이다. 결혼하면 가족이 된다는 말을 들으면 이전에는 '뭐 그런 당연한 말을..' 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가족이 된다. 무슨 말이냐면 연애할 때 애인에게 느끼는 감정이나 애인을 대하는 태도같은 건 내가 부모님이나 형제자매들에게 느끼거나 그들을 대하는 것과 전혀 다를 수 있어도, 결혼 후엔 아니라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애인일 때의 느낌은 희미해지고, 일상의 존재가 되면서 이전에 가족들에게 느끼던 감정, 그들을 대하던..

일상/2013~2019 2021.09.20

낭만적인, 로맨틱한

나는 낭만을 사랑하고 로맨틱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해왔다. 근데 최근에 무엇이 낭만적인 것이고 로맨틱한 것인지 점점 더 헷갈리는 기분이다. 낭만은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 '감미롭고 감상적인 분위기'라고 풀이하고 있다. 단어의 뜻을 찾다보니 낭만은 프랑스어 '로망(Roman)'을 소리대로 적은 일본식 한자표기라고 한다.(https://www.korean.go.kr/front/onlineQna/onlineQnaView.do?mn_id=216&qna_seq=130183) 즉 낭만적인 것과 로맨틱한 것은 원래 같은 뜻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단어들을 사용하는 구체적인 상황이나 맥락의 차이, 약간의 뉘..

일상/2020~2022 2021.09.20

영화, 콜미바이유어네임

책은 아니지만, 영화 을 봤다. 엘리오에게 아빠가 해주는 이야기들이 마음에 와닿았다.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들. You're both lucky to have found each other 둘 다 서로를 찾았으니 운이 좋은 거다 because you too are good 왜냐하면 너희 둘은 좋은 사람들이니까 Right now you many not want to feel anything. 지금은 아무 감정도 느끼고 싶지 않을 수도 있어. Perhaps you never wished to feel anything. 평생 느끼지 않고 싶을지도 몰라 And perhaps it's not to me that you'll want to speak about these things.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내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