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심리상담

심리상담 3 - 5

참참. 2021. 10. 3. 07:39

 

어제 5회기 상담에 갔다. 몸이 좋지 않아서 상담을 취소할까 고민했었다. 그 장소까지 갈 수 없을 정도로 아픈 건 아니었지만, 먹은 게 없어 에너지가 별로 없고 머리가 무거워서 과연 정말 깊은 대화를 나누거나 뭔가를 잘 배울 수 있는 상태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선생님도 원래 그림을 그리기로 했던 예정을 바꾸어서 하고싶은 이야기들을 나누는 게 낫겠다고 하셨다. 좀 피곤해보인다고. 나 역시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해석하는 과정을 하기에는 에너지가 좀 부족한 것 같아서 좋다고 했고 그렇게 했다.

정리를 해가지 않아서 두서가 없었지만 겪게 된 갈등의 시작과 진행과 각 순간마다 내가 느꼈던 감정이나 들었던 생각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떤 순간에 내가 스스로 어떤 마음인지 모르겠다고 느낀 것에 대해 선생님은 그런 상황이었다면 그동안의 트라우마로 보았을 때 불안이나 두려움이었을 것 같다고 했다. 나의 지금 사고회로는 사소한 것에서 "내가 싫어졌나? 나를 떠나려고 하나?"와 같은 결론으로 건너뛰게 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고. 그런 상황들을 상당히 최근에 겪어왔으므로. 

그 다음으로 이어진 상황들에서 내가 이전의 연애에서 비슷한 갈등을 겪었던 경험과 비교했을 때 생각보다 그렇게 불안하지도 않고 절망스럽거나 무너지는 것 같거나 그러지도 않아서 그런 느낌이 오히려 약간 생소하기도 했다고 했더니, 단호하게 그게 정상이라고 하셨다. 맨날 그러면 어떻게 살겠냐고, 그 관계가 건강한 관계겠냐고. 듣고보니 참으로 그렇다. 살 수가 없었다. 사소한 갈등에서 촉발되는 엄청난 절망같은 자극들로 일상을 무너뜨려왔다는 게 이제는 보인다. 그리고 선생님은 또 이미 그렇게 느꼈다면 많이 좋아진 것이니 다행이라고 하셨다.

아주 구체적으로 행동에 대한 조언이나 팁도 주셔서 좋았다. 그 중 일부는 내가 스스로 생각한 것과 비슷해서 더 좋았다. 내 마음을 잘 모르겠는 상황에서도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을 얘기하기. 침묵은 상황에 따라 서로에게 극히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말을 아끼게 되는 것은 아마도 후회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처음에는 떠오르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다 말하는 편이었다. 오히려 첫 연애 상대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고 한참을 생각해서 나중에야 답이 왔었다. 나는 그게 답답해서 계속 다그쳤던 기억이 있다. 무슨 말이든 하라고, 그냥 지금의 느낌에 대해서라도 말해달라고, 근데 그래도 그는 정말 한 마디도 안했었다. 근데 나중에 그것들을 엄청 후회했다. 그렇게 쏘아대지 말걸, 아무리 솔직한 감정이어도 그렇게 상처줄 수 있는 말을 막 하지 말걸, 한번 더 생각하고 더 조심스럽게 할걸, 그 사람의 속도를 기다려줄 걸,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그런 후회들이 쌓이고 이후에도 말실수나 갈등으로 관계가 틀어지고 마는 상황들을 겪으면서 점점 더 조심스러워졌다. 상처주고 싶지 않고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으니까, 싸우기가 점점 어려워졌던 것 같다. 차라리 내 감정과 내 주장을 지우고 상대방에 맞추는 일들이 늘어갔다. 이제 생각해보니 내가 처음부터 내 감정을 이렇게 잘 몰랐던 게 아닌 것 같다. 내 감정에 취해서 상처주는 일이 싫다는 이유로 내 감정을 죽이는 데 익숙해지다보니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그 감각을 다시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렇게 나를 지우고 무조건 상대를 받아들이고 맞춰주려고 해봐도 결국 좋은 관계가 되지 않았으므로. 내가 아직 잔뜩 쏘아붙일 수 있었을 때 같이 잘 싸울 수 있는 사람을 만났으면 달랐을까?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그 양극단을 다 해보고 둘 다를 후회하기도 하면서 이만큼 살아냈고 그 덕에 드디어 무엇이 건강한 관계인지를 조금이나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다른 싸움도 가능해진 것 같다.

내가 나 자신을 너무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하니 선생님은 더 구체적으로 뭘 모르는 것 같냐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뭔지, 지금 뭘 먹고 싶은지, 내가 진짜 하고싶은 게 뭔지 이런 것도 하나도 잘 느껴지지 않고 30년이나 나를 데리고 살았는데 어쩜 이렇게 모르나 싶다고 그런 말을 했다. 선생님은 아니라고 했다. 모르지 않는다고. 물론 세부적인 사항들은 모르는 것도 있고 더 채워나가야하는 부분들이 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게 전혀 아니라고. 아니까 여기까지 와있는 거고 어떤 방향으로 자신을 데려가고 싶은지 이미 알고 있지 않냐고, 평생 모르는 사람도 많은데.

정확한 워딩이 기억나지 않아서 아쉽지만, 선생님도 내가 받아들인 걸 내 언어로 다시 얘기하라고 했으니까, 정확한 단어들을 기억하지 못해도 그건 그거대로 어쩔 수 없는 일, 결국 내가 받아들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니. 그리고 역시나 그 단호함과 단단한 말들이 내 혼란을 조금 잠재워주었다. 선생님의 피하지 않고 확신을 담아 똑바로 쳐다보는 눈빛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그리고 선생님은 내가 했던 이야기들을 정말 잘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무엇이 반복되는지 그 안에 어떤 숨겨진 맥락들이 있는지 점점 더 파악이 된다. 

더 다른 얘기들도 해주셨던 것 같은데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는 삶 전체에서 어떤 시기에 와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2013년, 군대 제대를 기점으로 공부하는 학생의 정체성으로 대표되던 내 삶을, 활동가로서의 삶으로 바꾸었다. 이상과 신념과 가치, 인간적인 것들, 사랑을 쫓았다. 그렇게 20대를 살았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빛나는 순간들이었고 열정을 쏟았던 시기였다. 열심히라는 것은 언제나 한계가 없어서, 정말로 최선을 다했냐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어려운 순간이 많았지만, 분명히 그 시절의 내 나름의 열심을 다해서 살았던 시간들이었다.

근데 나는 지나간 시간들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나. 긍정적으로 떠올린 적도 많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실패했다'거나, '도망쳤다'거나, 미안하거나 그때 만났던 사람들을 나는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그들에게 나는 별로 소중한 존재가 아닌 것 같다거나, 그런 생각들을 했다. 그런 식으로 느껴졌다. 자꾸만. 활동가라고 하는 것에 대한 내 스스로의 기준도 꽤나 높았기도 했고, '진정한'같은 단어들을 붙여가면서 자신을 몰아붙이기도 했다. 절대 어떤 순간에도 상냥하고 올바른 사람이어야한다거나, 플라스틱을 단 하나라도 쓰면 안된다거나 그런 일은 사실 불가능한데. 

선생님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그건 정말 대단한 거라고 단호하게 반복해서 얘기해주셨다. 도망친 게 아니라 맞지 않는 것을 알고 제때에 내려놓은 거라고 했다. 솔직히 맞다. 나도 평생을 투신하지 않고 활동하다가 다른 일을 하게 된 사람들에 대해서 이제는 배신자라고 느끼거나 그러지 않는데 왜 나 자신에 대해서는 그랬을까. 다른 사람들의 진심은 헤아리면서 왜 내 진심은 의심할까. 누군가에게 잘 살아왔다는 말을 진심으로 듣는 일은 신기하게도 정말 큰 위안이 된다. "그런 말을 해도, " 라는 식으로 생각했던 과거의 나는 정말 어리석었다.

대책없이 바보같았던 게 아니라, 그렇게 기댈 곳도 제대로 없는 상황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했던 것이다. 내가 바라는 삶을, 내가 원하는 일을, 내가 가치있다고 생각하고 내 삶에 그때 필요했던 것들을. 그렇게 살아오는 건 절대 쉬운 일도 아니었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잘 살아왔다. 부정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럴 것은 하나도 없다.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크게 두 가지 주제의 이야기를 했지만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잘 바라보고 잘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어떤 면에서 봐도 나는 나를 보고 나를 배우고 나를 채워가는 시기에 와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나름의 최선을 다해 그렇게 하고 있다.

내가 여전히 내 과거와 나 자신을 습관적으로 부정하고 비난하는 어조의 말들을 내뱉을 때가 있다는 걸, 내가 내 과거를 너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고, 끝나고 신기할 만큼 몸도 마음도 상담 전보다 더 가벼워진 걸 느꼈다. 배도 고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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