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심리상담

심리상담 3 - 4

참참. 2021. 9. 25. 16:31

 

선생님께서 그동안 몸이 좋지 않으셔서 2주만에 만났다. 어떻게 지냈냐는 얘기에 할머니 얘길 꺼냈다가 그대로 가족사 이야기로 흘러갔다.

할머니는 7남매를 낳으셨고, 애기때 돌아가신 한 분을 제외하고 아들 셋, 딸 셋, 총 6남매를 키우셨는데, 큰 고모와 둘째 고모가 내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다. 아마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던 것 같다. 막내 고모는 살아계신데, 막내 고모의 남편(고모부)과 큰아들도 교통사고로 죽었다. 당시 같은 차의 뒷좌석에 타고 있었던 막내 고모와 둘째아들은 목숨을 건졌다.

내가 여섯 살일 때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내가 열일곱 살 때 할머니의 6남매 중 가장 막내인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때 할머니의 나이가 이미 여든여섯이셨다. 아버지는 단순히 막내 아들일 뿐 아니라, 분가해서 독립한 다른 자식들과 달리 끝까지 할머니를 모시며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자식이었다. 나와 동생 역시 고등학교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할머니의 밥을 먹으며 컸다.

할머니는 101세가 되신 지금까지도 나이에 비해 정정하신 편이지만, 막내아들을 잃음과 동시에 같이 살던 며느리, 손자, 손녀 모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갑자기 그 시골집에 홀로 남게 되신 후로 급격히 약해지셨다. 아흔 즈음 되셨을 때부터 치매 초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지금은 나를 만나도 1분마다 내가 누구인지 다시 물어보시게 되었다. 혼자 사시다가 막내 고모가 서울에서, 큰댁이 강릉에서, 다시 막내 고모가 서울에서 모시다가, 올해 요양원으로 모시게 되었다.

할머니만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팠는데, 요양원에 뵈러 가보았더니 당신의 자식들 집에 살 때보다 더 표정이 편안해보이셔서 그래도 마음이 놓였다. 자식이라해도 같은 질문을 계속 하는 사람을 어떻게 계속 웃는 낯으로 케어하겠는가. 게다가 그 이전에 쌓여있던 관계의 앙금도 다 없어지지 않았을 터인데.

이 얘기들을 다 들은 선생님은, 내가 애착관계를 잘 형성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분위기였을 것 같다고 하셨다. 살을 비비고 사는 가정의 상이라든가 모델로 삼을 만한 그런 관계가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 나는 아버지가 그래도 꽤 성장한 고등학생 때 돌아가셔서 그나마 충격이 덜하지 않았을까하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오히려 꽤 성장한 상태였기 때문에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을 수 있다고 했다. 배가 너무 고프면 당장 무엇이라도 집어먹어야하듯이, 사랑이 급했기 때문에 큰 기준없이 끌렸을 수 있다고. 그것도 다 살기 위해서 한 일이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이전의 나로서는 깨달을 수 없었지만, 지금의 나는 어느 정도 거기에서 빠져나왔는지, 내게도 과거의 내가 그렇게 보인다. 이전에는 그냥 내가 그런 타입, 그런 성격인 줄 알았다. 그 경험들에 맥락을 만들고 이유를 찾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많은 새로운 것들을 알아차리고 나를 새롭게 보는 일이었다.

얘기하다보니 내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나는 나름대로 꽤 의연하게, 크게 매이지 않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애도가 부족해보인다고 했다. 선생님은 선생님의 말에 항상 동의하지 않아도 되고 항상 정답이 아니라고 했지만, 대부분은 공감이 간다. 분명 내가 원해서 했던 결혼, 내가 원해서 했던 귀촌생활에서 내가 어떻게 무기력해져갔는지를 돌이켜보면서 생각했던 것들이 이유를 찾았다. 왜 그렇게 목표없는 생활을 견딜 수 없었는지. 무엇인가에 사로잡혀있지 않으면,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그것만 보고 달려나가는 상태가 아니면 안됐다. 무기력해졌다. 근데 그렇다는 것까지는 가까스로 깨달을 수 있었으나 "왜" 그러는지, 어떻게 하면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지는 몰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제야 그 이유를 조금씩 찾아가고, 모아가고 있다. 어쩌면 그건 그렇게 무언가에 정신을 다 쏟고 있지 않으면, 모두가 떠나가고 내 곁엔 아무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내 공허와 정면으로 마주해야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한창 책을 많이 읽던 고등학생 시절 누군가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 마음에 떠오른 답이 '도피'였던 기억이 남아있다. 도망치고 있었다. 무언가로부터. 현실로부터. 나 자신으로부터. 내 마음으로부터. 언제부터였는지, 또 언제까지인지도 모르게. 몇년 전에도 어쩌면 내가 선택해온 것들이라는 게 다 도망치기 위한 것들은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혼하고 작년부터 올해, 본격적으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들을 갖고 있다. 그러던 중에 꽂힌 낱말 중 하나가 '도망'이었다. 일본드라마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에도 꽂혔었고, 심리 소재 웹툰인 <닥터 프로스트>의 이종범 작가님의 에세이집인 <그래, 잠시만 도망가자>도 몇번이나 읽었다. 선우정아의 노래 <도망가자>도 좋았다. 어쩌면 나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지만 도망치고 있었고 또 그렇게 도망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나 자신을 좋아할 수 없었는지도.

활동가로 일하다보면 온갖 사례들과 마주하게 된다. 꼭 활동가로 일하면서뿐만 아니라 주변을 둘러보면 나보다 더 어렵게 살아온 사람이 수도없이 많아보인다. 그래서 나는 그에 비하면 그럭저럭 평탄하게 살아온 거 아닌가, 큰 어려움없이 살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해왔다. 바보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내 힘듦이 아무렇지 않아지는 건 아니다. 나도 제대로 기댈 곳도 없다는 기분 속에서 긴 시간동안 그래도 잘 견뎌내고 잘 헤쳐오느라 고생했다는 걸 느꼈다. 내 정서적, 감정적 어려움들을, 내가 겪어온 죽음과 이별과 상실의 경험들과 그로부터 받은 상처들을 과소평가했다. 제대로 바라보고 애도하지 않고 보이지 않게 치워두었는지도 모른다. 적당히 애도하고, 일단 계속 살아야하니까. 그렇게 다 끝마치지 못했던 것들을 최근 하나하나 풀어서 매듭 짓고 있는 기분이다.

최근 관계에서 조금씩 더 깊은 스킨십으로 나아가다보니 이전 관계에서 조급하게, 빨리 더 깊은 스킨십으로 나아가던 습관이나 트라우마들이 남아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는 얘기도 했다. 선생님도 이전 연애가 끝난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게 아니라서 좀 더 디톡스 과정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이미 5주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면 그것만으로도 이전의 패턴과는 벌써 확실히 다른 거라고 단호하게 말해주셨다.

사랑에 대한 것은 내 이번 생의 업일 수도 있다는 얘길 해주셨다. 신기한 게 나도 몇년 전에 그런 비슷한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마음을 제대로 기댈 수 없는 관계들을 반복하는 건, 어쩌면 그게 내 이번 생의 과제이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묘한 생각이었다. 선생님이 말한 것과 맥락이 좀 다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신기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런 결핍된 것 같은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물어보셨는데, 이미 내가 그렇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고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이라서 분명히 나아졌다는 걸 알겠고,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느껴지지만 그래도 앞으로도 계속 더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내가 갖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잔잔한 일상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해 무기력해하던 내가 이미 아니므로.

이건 타인이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다. 그렇게 말씀하셨고,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 결국 내가 내 안에서 꺼내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걸 꺼낼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도 꼭 필요한 일인 것 같다. 그것들이 분명 이미 내 안에 있었고 또 스스로 느끼기에도 그동안의 경험들을 통해 그것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해석할 수 있도록 때가 무르익어온 것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명확한 언어와 적절한 질문들로 그곳에 시선을 두게 해주고, 무엇을 문제로 규정할지 어떤 방향으로 자신에 대한 생각들을 확장하고 파고들어갈지 제시해주지 않았으면 훨씬 더 오래 걸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의 마음이, 지금의 관계가 이전에 반복해왔던 것들과 다른 지점들이 많은 덕분에 이전의 마음들과 이전의 관계들이 어땠는지를 더 잘 바라볼 수 있다. 갑자기 완전히 없애거나 달라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역시 여전히 거기에 갇혀있었다면 이만큼 보이지 않았으리라는 걸 오늘의 상담으로 다시 한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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