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책읽기 118

<아내라는 이상한 존재>, 배윤민정

아무 생각없이 방바닥에 누워 고개를 돌렸는데 함께 사는 연인의 책장에 꽂혀 있던 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역시 별생각없이 이 책은 뭘까하고 꺼내어서 누운 채로 잠깐 살펴보기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오늘 바로 다 읽어버리게 될 줄은 몰랐다. 책은 거칠게 요약하자면 저자가 이혼의 과정을 겪으면서, 그 체험(단순히 겪은 것)을 경험(그것을 반추하여 나름대로 해석하고 소화시켜 받아들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거기까지 오는 동안 있었던 일들과 생각들과 마음들을 돌아보는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이혼을 겪었기 때문인지, 이혼경험에 대한 이야기에 전보다 좀 더 눈길이 가는 것 같다. (아무 상관없지만 저자와 내 이혼한 년도가 같다는 것도 신기했다) 혼란스러운 마음들이 솔직하게 드러나있다. 스스로도 에필로그에서는 낯설..

<일하는 마음>, 제현주

서로의 시도와 성취들에 (칭찬이 아니라) 감탄하는 것, 그 감탄을 가감 없이 전하는 것이 서로를 향한 최고의 임파워먼트라는 점이다. 기꺼이 박수 보내는 청중이 되어주는 것, 대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중하기 때문에 하는 일들의 값어치를 알아주는 것, 그러다 보면 대단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축복하는 것이 우리가 디엣지레터를 통해 서로에게 하는 일이다. - 249-250쪽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은유

자기 인식은 시작이 어렵지, 일단 시작되면 파도처럼 밀려온다. 막을 수도 없고 거스를 수도 없다.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망설임 없이 말한다. "박사 학위는 따지 않기로 했지만 더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고.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 170p

김성은, <점자로 쓴 다이어리>

김성은 작가님의 를 읽었다. 작가님은 물처럼 살고 싶다며 “작은 얼음 틀에 갇혀서 꽁꽁 얼어버린 얼음 조각같이 좁고 뾰족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크고 넓은 곳을 향해 유연하게 흘러가도 좋았을 지난날들이 후회스럽다.”고 쓰셨다. 물과 대비되는 특성을 얼음에 비유하신 것이 절묘하게 느껴졌다. 얼음은 물과 매우 다르게 느껴지지만 실은 물의 다른 상태일 뿐이지 않은가. 온도가 조금만 따뜻해지면 얼음은 녹아 물이 된다. 몇 도쯤 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 마음이 뾰족하고 단단하게 얼어있다면 얼음만 탓할 일은 아니다. 그저 조금 더 따뜻한 곳으로 가거나, 나에게 온기를 줄 수 있는 무엇들을 가까이 둘 일이다.

<페미니즘으로 다시 쓰는 공주 이야기>

인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이야기가 아닐까 종종 생각한다. 우리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이야기에 열광하고 결국 이야기로 남는 존재다. 올해 롤드컵(리그오브레전드 월드 챔피언십)에서 펼쳐진 스토리는 만화보다 더 만화 같았다. 늘 최고의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평가받았지만 유독 롤드컵과는 연이 없었던 10년차 프로게이머의 은퇴 전 마지막 도전. 국내리그 정규시즌 중위권 성적으로 롤드컵 출전권을 따내는 것부터 난관의 시작이었던 팀 DRX가 세계 각국의 리그에서 올라온 팀들을 꺾으며 점점 성장하더니 올해 내내 만날 때마다 졌던 우승후보들을 모두 꺾고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전세계 수많은 팬들이 열광하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말 한마디 나눠본 적도 없는 남의 일에 눈물을 줄줄 흘리게 하는 힘이 대체 어디서 올까...

<계절에 따라 산다>, 모리시타 노리코

"얼마 전에 다도 수업을 하면서 '유록화홍' 족자를 걸었어." "아, 그거..." 마침 3월이었다. 버들은 푸르디푸르게 바람에 너울거리고, 꽃은 선명한 색깔로 피어나는 계절이니까... 그래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간은 이렇게 말했다.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는 아이들을 위해서였어." "...응?" "사회에 나가면 벽에 부딪칠 일이 많잖아. 그럴 때는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훌륭해 보이기 마련인걸. 졸업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들 나다운 것을 부정하고 내가 아닌 것이 되려고 해... 하지만 버들은 꽃이 될 수 없고, 꽃도 버들이 될 수 없어. 꽃은 어디까지나 붉게 피어나면 되는 거고, 버들은 어디까지나 푸르게 우거지면 되는 거야." 나 역시도 몇 번이나 그런 적이 있다. 나 같은 건 착실하다는 것 말..

삶의 태도

하루도 같지 않은 서쪽 하늘의 파노라마를 혼자 보는 것이 너무 아깝다고 했다. 친구, 친척, 이웃은 물론이고 이미 세상을 떠난 죽은 사람들까지 모두 불러 저 하늘을 보여주고 싶다고 엄마는 말했다. "그렇지? 너도 네 친구들 모두 불러 보여주고 싶지?" 도시에서 혼자서 침묵하는 법을 터득해가는 딸을 알지 못한 채 물색없이 뺨이 붉게 물드는 엄마에게 심통이 나서 대답했다. "내 친구들은 저런 것 봐도 아름다운 거 몰라, 그런 걸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 아이들이 많아." 엄마의 눈빛에 한순간 당혹과 실망이 일더니, 잠시 후 단호한 눈빛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 친구들이랑은 놀지 마." 임대 아파트에 사는 친구랑은 놀지 말라거나 공부 못하는 친구와 놀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줄 모르는 ..

누군가에게 마음을 쓴다는 건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누군가에게 마음을 쓴다는 건,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은 'TMI Too Much Information'를 가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이 지금 어떤 마음 상태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또 무엇을 가리는지, 요즘 무엇이 필요하다고 했었는지, 이 둘 중에 그 사람이라면 무엇을 고를지. 사소하지만 사실은 제일 중요한 그런 디테일을 알려고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물도 잘 줬는데 왜 시들어버린 거냐고 애꿎은 식물만 탓하는 사람이 되겠지. "내 마음을 궁금해하는 사람을 곁에 둬야 한다. 그리고 나도 상대의 마음을 궁금해해야 한다. 나에 대한 마음을 궁금해하는 것 말고 그냥 상대의 마음이 궁금해야 한다. 우리는 궁금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우지 않았다. 그게 얼마나 따뜻..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지만

"우리는 아무 이야기나 서로에게 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낯 뜨거운 욕심이나 남들이 들었다면 재수 없다고 혀를 찼을 생각, 별로 재미없지만 꼭 하고 싶은 농담 같은 것을 얼마든지 들어준다. 네가 소철 화분에 물을 많이 줘 죽인 것에 두고두고 죄책감을 느낀다는 건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지만 나는 알고 싶다. 내가 어제저녁 고양이 키우는 꿈을 꿨다는 건 누구도 알 필요 없지만 그게 어떤 고양이였는지 너에게는 말해줄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아니었다면 무심히 흘려보냈을 삶의 사소한 조각들을 발견하고 있다. 오늘 저녁에는 퇴근해 돌아온 너에게 이 글을 읽어줄 것이다. 우리는 또 이걸로 한참 뒹굴거리며 수다를 떨겠지.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를 둥글둥글 감싸 안겠지. 서로를 보게 될 거야. 그러면 우리는 별거 아..

《송해 1927》, 송해X이기남 저

나는 영화를 별로 보지 않는 사람이다. TV도 거의 보지 않는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로는 (군대를 제외하면) 생활공간에 TV가 있었던 적이 없고 굳이 별로 찾아서 보지도 않는다. 그러다보니 "그걸 안 봤다고?"같은 말을 듣는 게 일상이다. 때문에 연예인도 아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 보통 '에이 설마'라고 하는 사람도 잘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물론 송해 선생님을 모를 순 없다. 집에 TV가 있던 시절에 나 역시 전국노래자랑을 꽤 여러번 봤으니까. 게다가 그렇게 오랫동안 현역으로 계속 하고 계시니까 말이다. 그래도 역시 큰 관심은 없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나와 만날 일도 없고 상관도 없는 연예인에게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최근 개봉한 영화와 같은 제목을 ..

간지럼태우기

양다솔 작가님의 간지럼태우기라는 책을 저자 사인까지 받아서 선물 받았다. 적어주신 익살스러운 문구에 웃으며 책장을 넘겼으나 서문을 다 읽기도 전에 이 문장들을 만났다. 길을 걷다 너무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 나도 모르게 발길이 멈추듯, "나는 다른 나를 상상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는 문장에 멈추어 오래오래 눈길을 주었다. 그 문장이 불러일으키는 감정, 과거의 내가 느꼈던 어떤 기분, 느낌들, 연관된 기억들이 여기저기서 꿈틀거리고 딸려올라왔다.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수 없으므로 책장을 덮었다. 최근에 책에 밑줄을 그으며 날짜를 적어넣어보았다. 언제 그은 밑줄인지를 기억하고 싶어서. 나는 오랫동안 한번 읽은 책은 다시 읽지 않는 사람이었고 책을 접거나 밑줄을 긋는 일도 별로 하지 않았다. 어쩐 일인..

영화, 콜미바이유어네임

책은 아니지만, 영화 을 봤다. 엘리오에게 아빠가 해주는 이야기들이 마음에 와닿았다.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들. You're both lucky to have found each other 둘 다 서로를 찾았으니 운이 좋은 거다 because you too are good 왜냐하면 너희 둘은 좋은 사람들이니까 Right now you many not want to feel anything. 지금은 아무 감정도 느끼고 싶지 않을 수도 있어. Perhaps you never wished to feel anything. 평생 느끼지 않고 싶을지도 몰라 And perhaps it's not to me that you'll want to speak about these things.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내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