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책읽기

<페미니즘으로 다시 쓰는 공주 이야기>

참참. 2022. 11. 16. 19:53
인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이야기가 아닐까 종종 생각한다. 우리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이야기에 열광하고 결국 이야기로 남는 존재다.
올해 롤드컵(리그오브레전드 월드 챔피언십)에서 펼쳐진 스토리는 만화보다 더 만화 같았다. 늘 최고의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평가받았지만 유독 롤드컵과는 연이 없었던 10년차 프로게이머의 은퇴 전 마지막 도전. 국내리그 정규시즌 중위권 성적으로 롤드컵 출전권을 따내는 것부터 난관의 시작이었던 팀 DRX가 세계 각국의 리그에서 올라온 팀들을 꺾으며 점점 성장하더니 올해 내내 만날 때마다 졌던 우승후보들을 모두 꺾고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전세계 수많은 팬들이 열광하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말 한마디 나눠본 적도 없는 남의 일에 눈물을 줄줄 흘리게 하는 힘이 대체 어디서 올까.
<전지적 독자시점>(웹소설/웹툰)에서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로 등장하는 “성좌”들은 그 사이에서 또 급이 나뉘는데 위인급, 설화급, 신화급과 같이 분류된다. 성좌들이 갖는 힘은 그 성좌와 관련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회자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설정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널리 알려져있는 강력한 스토리를 가졌을수록 더 큰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들을 섭취하고 곱씹는가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된다.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이야기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우리의 집단적 사고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한번 뇌리에 남기 시작한 이야기는 여간해서는 지워지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수도없이 접하게 되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거의 언제나 모험을 떠나는 남자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남자주인공이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일을 겪고 다양한 꿈과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여자 캐릭터들은 자신을 희생해서까지 도움을 주는 선녀 또는 전리품(!)이거나 방해하고 유혹하고 악행을 일삼는 악녀이거나 결국 남자한테 사랑받기만을 원하는 존재이거나 매번 대충 그런 식으로만 그려진다.
<페미니즘으로 다시 쓰는 공주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용감하고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멈춰있지 않고 성장한다. 주저없이 군함을 폭파시켜버리는 공주님은 낯설다. 그러나 공주가 아니라 왕자라면 그리 어색하지 않다. 그러니까 그건 그냥 익숙함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겨울왕국에서 그나마 남자주인공이라고 할만한 녀석은 세계를 구하네 마네하는 순간에도 사랑노래 뮤지컬 찍고 있다. 그 파트가 꽤 길어서 영화를 보는 와중에도 생뚱맞다고 느낄 정도였다. 근데 가냘프게 그려진 여성캐릭터가 그랬다고 한다면 그 장면이 덜 어색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안에 흐르는 이야기가 바뀔 때 우리에게 익숙하고 당연한 것들도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반가웠다. 게다가 재해석한 이야기들은 아무리 그냥 옛날이야기니까 하고 넘어가려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많았던 원작보다 더 재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