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책읽기/마음이 머무는 구절

<계절에 따라 산다>, 모리시타 노리코

참참. 2022. 7. 18. 08:16

 

"얼마 전에 다도 수업을 하면서 '유록화홍' 족자를 걸었어."
"아, 그거..."
마침 3월이었다. 버들은 푸르디푸르게 바람에 너울거리고, 꽃은 선명한 색깔로 피어나는 계절이니까... 그래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간은 이렇게 말했다.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는 아이들을 위해서였어."
"...응?"
"사회에 나가면 벽에 부딪칠 일이 많잖아. 그럴 때는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훌륭해 보이기 마련인걸. 졸업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들 나다운 것을 부정하고 내가 아닌 것이 되려고 해... 하지만 버들은 꽃이 될 수 없고, 꽃도 버들이 될 수 없어. 꽃은 어디까지나 붉게 피어나면 되는 거고, 버들은 어디까지나 푸르게 우거지면 되는 거야."
나 역시도 몇 번이나 그런 적이 있다. 나 같은 건 착실하다는 것 말고는 아무 장점도 없는, 시시한 인간인 것만 같아 견딜 수 없었다.
(중략)
"꽃은 붉게 피면 되고, 버들은 푸르게 우거지면 돼."
간의 그 말을 듣고, 그때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
그날 이후로 그 문구를 좋아하게 됐다. 지금도 다른 사람이 빛나 보일 때, 내가 나답지 않은 모습이 되려고 할 때, 그 말을 떠올린다.

모리시타 노리코, <계절에 따라 산다> 중에서

 

나다운 게 어떤 것인지를 알아가는 데는 꽤나 오랜 세월과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자주 보는 친구가 평소와 다른 엉뚱한 말이나 행동을 한다면 "너답지 않다"는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나 자신에 대해서는 과연 나다운 게 무엇인지 알아채기가 더 어렵다. 오히려 타인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만큼조차도 모르는 것같이 느껴진다. 아이러니하다. 가장 오랫동안 가장 속속들이 나를 보아온 사람은 나 자신일텐데도 나는 내가 어떨 때 기뻐하고 어떨 때 슬퍼하는지, 어떤 것에 익숙하고 어떤 것을 어려워하는지에 대해 30년이 넘어서야 이제 겨우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