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모든 사랑은 특별했다

참참. 2021. 9. 21. 09:51

 

모든 사랑은 특별했다. 의식적으로도 모든 사랑, 모든 관계를 더 특별하게 여기려고,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땅히 그래야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랑을 특별하게 여겼던 내가 좋다.

그럼에도, 굳이 그러했던 당시의 감정들을 재인에게 보여줄 필요는 없었는데, 하는 후회가 잠깐 들었다. 그리고 올라오는 이 불안감은 트라우마적인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실수하고 싶지 않다, 단 한번의 실수로 관계가 틀어지게 만들고 싶지 않다, 라는 두려움이다. 자신에게 불편한 이야기를 꺼냈다는 이유로 기약도 없이 연락을 끊어버렸던, 그래서 내가 계속 "이렇게 끝인가?"하고 절망하길 반복했던 기억들이 있다.  

초반의 연애들에서는 상대방을 바꾸려 들었다. 최근의 연애들에서는 나를 바꾸려 들었다. 모든 걸 받아주고 맞춰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근데, 그때는 그게 가능할 것만 같았는데, 지나고보니 전혀 가능하지 않았다. 그 시간들이 내게 주었던 환희만큼 많은 상처들이 쌓여왔음을 이제야 제대로 볼 수 있다. 결혼을 하고 이혼까지 해봤으면서도 그런 게 가능할 거라고 계속 믿었다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환상이었고, 또 정말로 건강한 관계를 겪어보지 못해서 다른 게 가능하다는 걸 알지 못했던 한계였다는 걸 이제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상대방을 바꾸려 들지도 않고 나를 바꾸려 들지도 않는 재인과의 관계가 생소하고, 특별하고, 소중하다. 이 만남이야말로 내 삶에서 가장 믿기지 않는 기적이라는 말을 일말의 과장도 섞지 않고 할 수 있다. 그런 얘기를 하기에는 아직 만난 시간이 짧다고 생각해서 마음 속에만 간직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단 한번도 "이 사랑이 마지막 사랑이겠구나", 라는 느낌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지금은 너무나 강렬하게 그런 느낌을 받고 있다. 이전까지의 관계들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 가장 환희에 찼던 순간에도 마지막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적은 없다. 그리고 이 느낌을 가장 환희에 찬 순간에 받는 게 아니라, 그냥 집에서 혼자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 그런 무심한 순간에 문득문득 받는다. 그런 일상의 순간들을 대하는 내 태도가 얼마나 완전히 달라졌는지를 자각하는 그 모든 순간들에 재인을 떠올린다.

이전의 사랑들은 요리하지 않던 나를, 그들을 위해 요리하게 만들었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하는 즐거움을 알게 해주었던 감사한 시간들이었다. 그렇지만 최근까지도 나는 나 혼자만을 위해서 요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재인을 만나고나서, 처음으로 나 자신만을 위해서도 기쁜 마음으로 요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의 사랑들이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는 기쁨을 내게 주었다면, 재인과의 사랑은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 자신에게 무언가를 해준다는 것의 기쁨을 그 어느 때보다 느끼게 해준다.

이전에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행위 중 하나가 '자해'였다. 읽는 나까지 아팠던 소설 <리틀 라이프>에서 주드는 면도칼로 끊임없이 자신의 팔에 자해를 한다. 그의 어린 시절의 불행과 트라우마를 다 읽으면서도 그 자해하는 심정, 자신의 팔을 긋는 감각이 어떤 감각인지는 잘 상상하기 어려웠다.

근데 문득, 내가 해왔던 것은 일종의 정서적 자해는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너무 무기력하고 삶은 너무나 무료하고 나는 너무도 외로워서, 어쩌면 그 상처마저도 희열이었다. 상처받는다는 것, 절망에 빠져들고 두려움에 떠는 것조차 격렬하게 살아있다는 감각을 주니까. 그때의 나에게는 어쩌면 그것도 살려고 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격렬한 환희와 절망을 미친듯이 왔다갔다하고,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는 순간에도 그런 것들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고 생각한 순간들이 있었다. 아직 내 마음이 그런 것조차 못 느낄 정도로 망가지거나 닳고 닳은 건 아니구나, 살아있구나, 그런 느낌이었달까.

하지만 그런 것들을 느낄 수 있을만큼 회복된 나를 내가 스스로 다시 소진시키고 있는 것인 줄을 그때는 몰랐다. 그 상처와 절망에 익숙해지려고 애쓰던 날들이었다. 내가 특별한 존재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계속, 계속 얘기했었다. 근데 아니다, 아무리 죽이고 없애려고 해봐도 나는 누군가에게 단 한사람에게라도 몹시 특별한 존재이고 싶은 마음이 계속 있다. 그리고 그렇게 격렬하고 요란스럽지 않게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배우고 있다.

전부터 좋아하던 김소연 시인의 문구가 새롭게 와닿는다.

기적 - 소리도 없이 조용히 도착한다, 믿고 있는 한. 요란한 기적은 대개 착각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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