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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와서 좋다

지난주에 발톱무좀 치료를 시작했다. 군대에서 얻었으니 10년 된 병이다. 엄지발톱 하나에서 소소하게 시작한 녀석은 이제 양쪽 발에 골고루 퍼졌다. "나는 10년이나 나를 방치해왔다"라는 문장을 떠올렸으나 이내 내 안의 무언가가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해왔다. 그렇다. 그걸 치료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들이 너무 많았을 뿐이다. 그냥 두어도 그다지 아프지도 않은 그것보다 더 아픈 결핍들을 채우기 위한 날들이었으므로. 과거의 어느 때라도 그때의 나름의 최선을 다해왔던 것이다. 4월부터 새로운 회사에서 일하게 됐다. 첫 출근하던 날 애인은 도시락과 와인을 챙겨왔고, 5시에 퇴근하여 선유도공원에 피크닉을 갔다. 그저 그런 회사, 그냥 버티듯이 다니는 곳 말고 더 좋은 곳에 가고 싶었다. 내 실력이나 자격을 ..

일상/2020~2022 2022.04.17

퇴사

갑자기 개발자로 일해보고 싶어졌을 때, 아직 개발도 코딩도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운 좋게 들어갈 수 있었던, (그런 나를 받아주셨던) 개발자로서의 첫 직장이 있었다. 연봉이나 커리어 면에서도, 코딩 실력이나 업무적인 체계같은 면에서도 좀 더 성장하고 싶어 21년 5월에 이직했던 회사가 또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2년은 다닐 줄 알았던 그 회사를 그제, 22년 3월 31일 부로 퇴사했다. 역시 이직을 위한 퇴사다. 다음주 월요일, 4월 4일부터는 다른 회사에 출근한다. 이전의 회사들도 나에게 개발자로의 커리어를 쌓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좋은 기회가 되어주었고, 감사한 사람들도 많지만, 이번엔 뭐랄까 더 설레는 기분이다. 오르는 연봉이나 조금 더 있는 복지혜택도 물론 기대되지만(근데 다니던 회사..

일상/2020~2022 2022.04.02

성격 급한 사람

나는 평생 내가 성격 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애인의 글에서 나는 기다려주는 사람이었다. 과거의 이야기들을 들은 상담선생님은 여기서 저기로 뛰어다니듯이 살 수밖에,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고 했다. 그 말들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를 수정하게 만든다. 어쩌면 성격이 급한 게 아니라 그냥 여유가 없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이후로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여유롭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무언가에 온통 정신을 빼앗겨있어야 살만했다. 정말로 돌아갈 곳이나 쉴 곳을 가져본 적이 없는 것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내가 나의 성취나 능력이나 가진 재산의 정도같은 것과 상관없이 그냥 나여도 괜찮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확인받는 것은 생존의 문제이므로 계속 그 감각을 찾아헤맸다. 많..

일상/심리상담 2022.04.02

애도의 시간

요즘 눈물이 많아졌다. 책을 보다가도 울고, 드라마를 보다가, 음악을 듣다가도 운다. 요즘 자주 우는구나하고 깨닫자, 몇 년 전 어느날 문득 마지막으로 울어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내가 메말라버린 느낌이었다. 메말라가는 나 자신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이혼을 하면서도 법원의 이혼절차가 다 끝날 때까지 한번도 울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제 울 수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양다솔 작가님의 서문에 나오는 "잘못 자리 잡은 현재가 계속해서 내일을 껴안고, 나는 다른 나를 상상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라는 문장이 마음에 남았는데, 그 문장이 불러오는 내 과거들 중 하나가 바로 그 기억이었다. 고작 서른 언저리에 나는 내 삶이나..

일상/심리상담 2022.03.20

어린 시절

아빠는 곤란하거나 미안하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무는 사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사라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말로 못했던 이야기를 글로 적어 보내는 사람이었다. 인터넷을 배워 이메일 계정을 만든 아빠가 가장 먼저 편지를 보낸 사람은 나였다. 아빠는 한 번도 나의 자취방에 온 적 없었지만 그 시기에 수많은 메일을 보냈다. 편지들을 읽을 때마다 내가 아는 아빠와 모르는 아빠에 대해, 두 아빠 사이에 놓인 아득한 간극에 대해 생각했다. 아빠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쓰고 또 썼다.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착한 딸이어서 고맙다고 썼다. 그 편지들에서 예전에는 보지 못한 아빠의 표정을 보았다. 미안해서 나타나지 못했던 아빠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어..

일상/심리상담 2022.03.12

3월9일 달리기

지난 몇달간 그래도 한달에 두번 정도씩은 달리기를 하고 있었는데 2월엔 하루도 못 달렸다. 5킬로미터 기록이 25분께에서 거의 30분으로 늘어났다. 게임에서는 대개 한번 올려놓은 레벨은 떨어지지 않지만(대신 점점 센 보스가 나오지만) 일상은 매일, 매주, 매달 반복하지 않으면 금세 잊게 되는 것들로 가득하다. 반복되는 것들이 지겨운 것인 줄 알았다. 새로운 것을 찾아헤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서른이 넘어서야 느낀다. 매년 오는 봄이 지겹지 않듯이, 모든 날 모든 순간이 다르고 소중하다. 인간의 기억체계는 비슷한 사건들을 범주화categorization하여 저장하므로 '처음처럼' 설레기는 어렵더라도 오늘은 오늘의 설렘이 있다. 오늘의 달리기에는 오늘의 즐거움이 있고 지난번에 읽은 책을 또 읽어도 역..

일상/2020~2022 2022.03.12

이직 준비

2월달은 중순 즈음부터는 거의 이직 준비로 보낸 것 같은 느낌이다. 그 과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나는 첫직장에서 php로 커리어를 시작한 뒤로 php를 주력 언어로 경력을 이어가게 됐다. 이번에 이직하면 세번째 직장이 되는데, 아무래도 기존 경력이 php이다보니 이번에도 php를 쓰는 곳으로 가게 될 것 같다. 파이썬을 쓰는 곳에도 서류를 내거나 코딩테스트까지 본 곳도 있었는데 다 떨어졌다.(사실 php쓰는 곳 중에서도 최종합격한 곳은 아직까지는 한 곳이 전부다.) 근데 원래는 php보다 파이썬이 더 좋아보여서 그걸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요즘은 일단 php를 잘해보고 싶다. php는 어느 모로 보나 트렌디한 언어는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버전업을 통해 충분히 괜찮은 언어가 됐고, 결국 한 언어..

일상/2020~2022 2022.03.07

외로운 사람

어제 상담에서 나는 열두 살 때의 나로 돌아갔다. 열두 살 때부터 나는 나 자신이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어떨 때는 그때 얻은 그 정체성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때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집에선 오직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었다. 아주 긴 시간동안 수없이 많은 게임을 했지만 가장 많이 한 건 채팅이었다. 게임 속에서, 또 인터넷게시판에서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었다. 지금까지 연락하는 사람은 사실상 한명도 없고 그 많은 사람 중 대부분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심지어 그 시절 온라인에서 채팅하는 것으로 모자라 손편지까지 주고받았던 사람들도 꽤 많다. 나는 그 편지들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데, 이름은 물론이고 편지 내용을 다 읽어봐도..

일상/심리상담 2022.02.20

22.02.16

이번주 들어 오랜만에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월요일에 재인이 집에 와있었다. 아침점심저녁을 다 차려주고 내가 일하는 동안 나가서 화분과 꽃을 사왔다. 집이 점점 더 예뻐진다. 뿐만 아니라 밸런타인이라고 멀리 있는 스벅까지 찾아가 비건브라우니를 사와서 초에 불까지 붙여주었다. 화요일 아침 늦게까지 꼭 끌어안고있다 그가 가고나니 갑자기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같은 기분이 됐다. 온갖 좋은 것들을, 사랑을 잔뜩 받기만 한 것 같아 어쩐지 미안하기도 하고. 말할 수 없이 고맙고 보고싶었다.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마음을 다잡기 위해 아침에 못했던 요가와 스쿼트를 하고 샤워를 했다. 땀이 찔끔 날 정도로 운동을 하면 몸에 힘이 생기고 마음에도 힘이 들어가는 것같은 느낌이 신기하다. 마음도 몸 안에 있다는 것이 실감난..

일상/2020~2022 2022.02.20

삶의 태도

하루도 같지 않은 서쪽 하늘의 파노라마를 혼자 보는 것이 너무 아깝다고 했다. 친구, 친척, 이웃은 물론이고 이미 세상을 떠난 죽은 사람들까지 모두 불러 저 하늘을 보여주고 싶다고 엄마는 말했다. "그렇지? 너도 네 친구들 모두 불러 보여주고 싶지?" 도시에서 혼자서 침묵하는 법을 터득해가는 딸을 알지 못한 채 물색없이 뺨이 붉게 물드는 엄마에게 심통이 나서 대답했다. "내 친구들은 저런 것 봐도 아름다운 거 몰라, 그런 걸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 아이들이 많아." 엄마의 눈빛에 한순간 당혹과 실망이 일더니, 잠시 후 단호한 눈빛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 친구들이랑은 놀지 마." 임대 아파트에 사는 친구랑은 놀지 말라거나 공부 못하는 친구와 놀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줄 모르는 ..

집에 대하여

이 집을 구하기 위해 3개월간 직거래 사이트를 보고, 다솔 씨 기준으로 80점은 줄 수 있는 집이라 이사를 왔다면서요? 집 보는 안목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요? 처음 자취방을 구할 때도 직거래 사이트에서 서울에 있는 모든 전세 알림은 저한테 오도록 설정해두고 하루 종일 봤어요. 좋은 집은 빨리 나가니까 직접 볼 기회가 생기면 아침 7시에 찾아가고 그랬죠. 이 집도 3개월 동안 매일 부동산에 전화하고, 앱을 보고, 직거래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구한 거예요. 엄마가 제 첫 자취방을 구할 때 이렇게 말했어요. “정말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많은 인생인데, 집이라도 들어오고 싶은 곳이면 좋겠다.” 전 그 마음이 너무 고맙고, 너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내 공간은 마음의 중심을 잡는 곳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

일상/2020~2022 2022.02.07

누군가에게 마음을 쓴다는 건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누군가에게 마음을 쓴다는 건,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은 'TMI Too Much Information'를 가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이 지금 어떤 마음 상태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또 무엇을 가리는지, 요즘 무엇이 필요하다고 했었는지, 이 둘 중에 그 사람이라면 무엇을 고를지. 사소하지만 사실은 제일 중요한 그런 디테일을 알려고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물도 잘 줬는데 왜 시들어버린 거냐고 애꿎은 식물만 탓하는 사람이 되겠지. "내 마음을 궁금해하는 사람을 곁에 둬야 한다. 그리고 나도 상대의 마음을 궁금해해야 한다. 나에 대한 마음을 궁금해하는 것 말고 그냥 상대의 마음이 궁금해야 한다. 우리는 궁금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우지 않았다. 그게 얼마나 따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