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이사 준비

참참. 2021. 10. 9. 10:28

 

10월 16일 토요일, 이사를 가게 됐다. 2019년 12월부터 산 성북동 셰어하우스가 공원 조성으로 인해 철거가 된다. 17살에 태어나서 쭉 살던 집을 떠나 고등학교 기숙사에 들어간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번도 한 공간에서 2년을 살아본 적이 없다. 그나마 이 셰어하우스가 1년 10개월 정도로 최장기간 거주한 곳이다.

이사가는 곳은 성북구-서울시-SH가 철거세입자에 대한 특별공급으로 제공해준 임대아파트다. 철거되는 건물이 내 건물이 아니고 그냥 세입자일 뿐이지만 그래도 좋은 조건에 살고 있었는데 지자체의 공원조성사업으로 인해 집이 철거되어 어쩔 수 없이 살던 집을 떠나야하는 것에 대해 보상을 받게 되어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사비용과 주거지원금으로 얼마간의 돈도 받을 예정(좀 아이러니하지만 이사를 간 뒤에 새로운 집에 전입신고를 한 것을 증명해야 그 뒤에 이사비용을 지급해준다고 한다.)이고, 많지 않은 선택권 중에 고르거나 포기해야했지만, 어쨌든 임대아파트에 들어갈 기회를 준 것은 나에겐 고마운 일이었다.

노원구 상계동과 양천구 신정동 정도가 선택권을 받은 시점에 특별공급으로 들어갈 수 있는 비어있는 임대아파트였는데, 현재 직장과의 거리를 고려해서 양천구 신정동을 골랐다. 공급받게 된 집은 약 10평 정도 되는데, 1인 가구에게 공급해주는 평수 중에는 제일 큰 평수다. 95년도 완공된 아파트라 조금 오래되긴 했지만, 그래도 혼자 살기에 10평이면 꽤 괜찮고, 월세는 임대아파트이니만큼 서울이라고 믿기지 않을만큼 싸고(보증금전환제도가 있는데 작고 귀여운 내 통장의 현금을 전부 털어서 보증금을 최대로 올리고 월세를 최대로 낮추려고 한다), 2호선 순환선이 아닌 지선이긴 하지만 그래도 양천구청역이라는 지하철역 바로 옆이라 위치도 맘에 든다. 

내 인생에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일단 계약기간은 최소 2년이고, 2년이 지나면 내 소득수준에 따라 월세에 할증이 붙긴 하지만 그래도 쫓아내진 않는다고 한다. 할증이 붙어도 서울에서 쌩으로 부동산 통해 월세집 구하는 고생을 하는 것에 비해서는 저렴한 월세일 것 같아서 이번에야말로 집을 좀 잘 꾸미고 임시거주가 아닌 '내 집'(당연히 절대 내 소유 될 일 없는 SH의 집이지만)이라는 느낌을 주는 공간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평생 가장 강하게 든다. 아이러니하게도 결혼할 때도 못 느껴봤던 욕구다.

다만, 정말로 살 게 많다. 이혼하면서 이 셰어하우스로 들어왔는데, 여긴 기존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냉장고나 세탁기나 식기, 조리도구같은 것들은 다 갖춰져있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들고 그냥 개인 짐과 몸만 들어왔다. 철거로 인해 셰어하우스의 셋이 동시에 나가게 되면서 공용으로 쓰던 가전 중 냉장고를 배정받긴 했지만 나머지는 정말 다 사야했다. 아직도 살 것들의 항목이 끝도 없이 생각난다. 세탁기, 가스레인지, 커튼, 도어락(이제 열쇠는 못 들고 다니겠다), 식탁, 도마, 그 외 각종 조리도구와 그릇, 공기청정기, 에어컨, 전기밥솥, 전자레인지와 전기밥솥을 올려놓을 가구, 빨래건조대, 매트리스(침대를 살까 엄청 고민했다), 인터넷 설치, 공유기,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설레고 의욕적인 마음에도 불구하고 약간 질려버릴 수 있을 정도의 정신없음이었는데, 고민을 함께 나눠주고 적절한 조언과 고르는 걸 도와주는 재인이 있어서 정말 고마웠다. 나만의 공간이지만 종종 재인과 함께 있는 공간으로써의 모습도 고려하게 되고 그걸 상상하는 것은 나만의 공간을 갖게 된다는 것과는 또 다른 설렘과 즐거움이기도 하고 한층 더 공간을 잘 꾸미고 싶다는 의욕을 생기게 하는 일이다.

심리상담하면서 '내 집'이라고 여길 만한 곳을 가지지 못했던 것 같네요, 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런가?"하고 좀 의문이 들었는데, 그 말을 듣고 또 지금의 이사를 준비하면서 생각하면 할수록 그 말이 정말 맞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말 그대로 한번도 가져보지 못해서 오히려 기대가 별로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뭘 기대해야할지도 모르니까. 그동안 살았던 곳들에서는 항상 임시로 머무는 곳이라는 느낌으로 산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결혼하고나서도 그랬다, 귀촌계획을 세우느라 임시, 귀촌해서도 시골집을 못 구해서 머무는 임시 원룸, 이런 식의 기간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좀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곳까지 결국 갔음에도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그땐 내 취향이 뭔지 감을 못 잡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내게 취향이라는 게 있(어야한)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참 많은 게 달라졌다는 걸 느낀다. (결혼 후에는 특히) 늘 돈이 너무 없다는 생각에 쪼들려서 안 그러려고 해도 가장 싼 물건을 자주 찾아보게 되고 대부분 그런 것을 사는 식으로 소비를 해왔는데, 지금은 아니다. 10만원, 20만원 정도 더 주더라도, 수십 만원이나, 백 만원 단위로 돈이 들어가더라도 마음에 들고, 성능도 좋고, 오래 쓸 수 있는 걸 사고 싶다. 잘 골라서 잘 샀을 때 기분이 좋다. 확실히 잘 쓸 수 있고, 쓰면서도 계속 만족도가 높다. 무조건 비쌀수록 좋은 건 아니지만 확실히 이것저것 고려해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다양해지고 어느 정도까지는 완성도나 질이 확실히 높아진다.

살 물건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맘에 드는 걸 고른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 급하지 않은 것들은 살아보면서 천천히 채워나가려고 한다. 갑자기 평생 안해본 인테리어에 대한 안목이 생길 리도 없다. 그래도 대충 살고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별로 없거나 그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이전과 달리 시행착오조차 돈 아깝다, 시간 아깝다 여기지 않고 하나하나 즐겁게 거쳐가보고 싶은 마음이다. 요란하게 노후준비니 재테크니 하는 이들에 비하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돈이 없지만, 또 막상 집을 사겠다거나 몇십 억을 모아서 노후를 준비하겠다거나 그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어차피 내 월급으론 말도 안 되고)과 비교하지만 않으면 그래도 먹고 살면서 그럭저럭 괜찮은 것들을 누릴 수 있을 만큼은 벌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행복해지는데 어느 정도의 안정된 수입은 꽤 중요한 요소지만 그 이상의 수입은 행복감을 늘리는 데 크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뻔한 연구결과들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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