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하는 게 아니라 사는 거다"
여태 미루다 재인이 빌려주어서 얼마 전 드디어 읽었던 홍승은 작가님의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에 이런 구절이 나왔다. 카페에서 '누구나 예술가 프로젝트' 활동을 하면서 계속 되뇌었던 말이라고 쓰셨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전에도 비슷한 맥락의 말들을 들을 때마다 울림이 있었던 것 같다. 이번에도 역시 울림이 컸다. 그래도 역시 추상적인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살다보면 종종 그게 무슨 뜻인지 느껴지게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아, 이 사람은 정말 사는 게 예술이구나, 랄까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들. 글로 만난 사람 중에는 '황안나' 작가님이 있다. 40년생인 작가님은 "맛있게 살기"라는 제목의 네이버블로그를 오래 운영하시기도 했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작가님은 내게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삶의 태도를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보여주셨다.
"월급날이 되면 갚을 빚 갚고 몇 푼 남지 않은 돈으로 지금은 없어진 종로서적에 들러서 시집도 한 권 사고 경동시장에 들러 팔다 남은 떨이 장미를 한 단 사는 것도 내가 누린 호사였다. 남들은 그랬을 거다. 그 지경으로 살면서 시집이라니, 장미꽃이라니! 실제로 나를 보고 어이없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 황안나, 《안나의 즐거운 인생 비법》
스카와 메이의 이번 결혼 전시도 내겐 그랬다. 전시라는 건 대놓고 예술이지만, 결혼식을 결혼 전시로 하다니! 그리고 그 안에 슬며시 펼쳐놓은 삶의 장면장면들을 엿보다보니 아, 이 사람들은 사는 게 예술이구나, 하는 마음이 되었다. 나도 결혼식이란 걸 겪어봤지만, 역시 결혼식을 하는 당사자가 되어서든 하객이 되어서든 가장 아쉬운 것은 축하해주러 시간 내어 걸음해준 사람들과 당사자는 정작 몇마디 나누지도 못한다는 것이었다. 내 결혼식에서도 그게 못내 아쉬워서 고민 끝에 청첩장을 엽서 형태로 만들어 청첩장 뒤에 메시지를 적어 식장에 들고와서 낼 수 있게 했었다.
메이는 웃으며 "두 번은 못하겠다 싶은" 일이라고 했지만 전시를 함께 기획하고, 작품을 만들고, 전시 기간인 4일동안 내내 전시장에 있으면서 온 사람들을 직접 맞이하고, 서로의 근황과 전시회 작품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나누고 같이 사진도 찍고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좋아보이던지. 나도 전시기간 중 내 시간에 맞게 즐거운 마음으로 가서 작품들을 보며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일상이 어떤건지 엿볼 수도 있었고 그래서 울컥하기도 하고, 두 사람과도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도 있었고 또 내 시간에 맞게 떠날 수 있어서 몹시 좋았다.
메이에게는 굉장히 인상깊은 기억도 하나 남아있다. 언제인지 무슨 일로 술을 마셨는지는 다 잊었지만 어쨌든 무슨 술자리가 파하면서 다들 아쉬웠을 때 메이의 제안으로 메이가 살던 집으로 한잔 더 하러 가게 됐었다. 근데 거기서 메이가 해보자고 제안한 놀이(?)가 있었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책장에 꽂혀있는 여러 시집 중에 각자 한 권씩을 골라 잠깐 보고 그 중에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 모두에게 소리내어 읽어주자는 거였다.
나에겐 말 그대로 "문화 충격"이었다. 술 마시면서 책 내용에 대한 토론 정도는 해봤지만, 시집이라니. 시집을 평소에 읽을 일도 잘 없는데 술 마시다가, 혼자도 아니고 여럿이 같이 술을 한창 마시다가 시집을 펼치다니. 그때까지 살면서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장면이었는지 그 생경했던 감각이 이후에도 가끔 생각이 났다. 근데 그렇게 생소한 일이었어도, 그리고 무슨 시를 읽었는지 이런 건 기억이 하나도 안 나도, 내가 그 시간을 좋다고 느꼈던 감정만은 분명하게 남아있다. 나는 그런 게 좋은 줄 해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어서 몰랐다. 그가 아니었으면 그런 경험을 어디 가서 해봤을까 싶다.
일상을 예술로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내 일상에 많은 영향을 준다. 본인들에게는 말 그대로 일상이겠지만, 그걸 지켜보는 나에게는 종종 예술이며, 다른 일상에 대한 상상을 가능하게 하고, 일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러니까 고마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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