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말, 속초
흐리고 비가 와도 아름다웠고 해가 뜨자 찬란했다. 함께한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는 느낌이 이렇게 기분좋은 것인지 몰랐다.
체하는 바람에 컨디션이 안좋고 머리가 아파서 어떤 글도 쓰기 어려웠는데, 이제 회복이 됐다.
오히려 그렇게 평소보다 더 약해진 상태에 있어보니까 내 의지가 전보다 더 단단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도 내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구나, 먼저 헤아릴 여유는 없지만 귀 기울일 수 있고 얼마간의 단호함을 유지할 수 있구나.
싸움을 하면 후회와 자책과 앙금이 남곤 했다. 좋은 싸움이라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관계에 갈등이 없을 수 없는데 잘 싸우는 방법을 모르니 이겨도 미안함과 후회와 자책이 남고 져도 앙금과 나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는 슬픔이 남았다. 그렇게 상대를 바꾸려하거나 나를 지워갔다. 나는 갈등상황을 잘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정은혜 선생님의 <싸움의 기술>이라는 책에 이런 문장들이 나온다.
"그 덕분에 싸움은 해결을 통해 갈등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넘어서 성장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싸움의 궁극적인 목표는 싸움을 일으키는 갈등을 넘어서는 것, 즉 관계의 성장과 자기 이해이다. 싸움을 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 화살을 들이민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상대가 스스로를 바라보도록 거울을 내미는 것이다."
"대충 끝낸 싸움에는 섣부른 사과와 반성과 용서가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끝까지 싸운 싸움에는 이해와 자비와 사랑이 있었다. 그리고 어떤 경우도 갈등 전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오히려 잘 싸우고 난 뒤에는 관계의 성장과 개인의 성장이 이어졌다."
이 문장들을 사랑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동경했다. 동경은 나에게서 아주 멀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나오는 감정 혹은 태도다. 즉 나는 내가 이 문장들이 표현하고 있는 무언가를 살아낼 수 있을까에 대해 자신이 없었다.
글로 배우고, 머리로 알던 어렴풋한 것들이 생생한 감각으로 느껴지고 삶으로 들어오는 순간들이 있다. 나의 이번 생에 이 문장들을 살아갈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감격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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