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392

여유의 역설

얼마 전까지의 나는, 여유시간이 많았다. 아니 사실상 여유시간이 아닌 시간이 별로 없었다고 하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작년에도, 올해 초까지도 하루에 3시간 정도만 생계를 위한 노동을 했고, 나머지 시간은 딱히 정해진 게 없는 시간이었다. 누군가와 약속이라도 잡혀있지 않으면 그 시간들은 무기력과 우울로 채워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여유시간이 많았던 그때는 그 시간들이 내게 여유로움을 주지 않았다. 여유롭다고 느끼질 못했다. 역설적으로, 하루에 약 11시간 이상을 생계를 위한 노동에 쓰게 되니(출, 퇴근이 각각 1시간 이상, 점심시간 1시간, 업무 8시간 이상) 여유시간이 얼마나 있는지 명확히 눈에 보인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정말로 여유시간임을 자각하게 됐다. 그 시간에 몹시 큰 여유로움을 느..

일상/2020~2022 2020.03.29

키보드를 사다

금요일날 9시 넘어서 퇴근을 했다. 목요일날 개인 사정 때문에 하루 쉬었는데, 가자마자 자리는 옮겨져있지(자리 배치가 바뀔 거라는 건 수요일에 듣긴 했지만), 컴퓨터 선은 하나도 안 꽂혀있지(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꽂는 걸 깜빡했다고 옆자리에 있는 상사분이 미안하다고 말씀은 해주셨다.), 그 와중에 아직 컴퓨터도 못 켰는데 당일까지, 혹은 다음 월요일까지 해야한다는 일들이 엄청나게 요청이 들어왔다. 애초에 받을 때부터 도저히 다 할 수가 없어서, 어떤 것은 결국 외주업체에 작업을 맡기기도 했다. 그랬는데도 결국 다른 직원이 일일이 하나씩 손으로 노가다해서 고쳐야하는 걸 그나마 좀 편하게 해줄 수 있게 도와주다가 9시 넘어서 퇴근했다. 이 회사에 다니는 최고의 장점이 그나마 빠른 퇴근이었는데, 난 진짜 야..

일상/2020~2022 2020.03.29

실패가 아니다

나 역시도 나도 모르게 "결혼에 실패했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실패랄 게 뭐 있나 싶다. 삶에 실패는 없다. 경험만 있을 뿐이다. 결혼했다가 이혼한 것이 실패라면, 대학교에 갔다가 그만둔 것도 실패고, 직장에 다니다가 그만둔 것도 실패고, 시골에 갔다가 서울로 돌아온 것도 실패인가? 점심으로 파스타를 먹으려다 1분 뒤 마음이 바뀌어서 김치찌개를 먹은 것도 실패인가? 그런 것이 실패라면 실패는 매우 일상적이고 얼마든지 해도 괜찮은 것이고, 사실 그런 것들을 '실패'라는 말로 깎아내릴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 입사 한 달도 안 된 상태에서 하루 휴가를 쓰고 이혼서류를 마저 정리하러 다녀왔다. 법원에는 다들 코로나로 연기되어서 그런지 원래 이혼하는 사람이 많은 건지 줄이 길었..

일상/2020~2022 2020.03.27

따릉이 타다가 체인이 빠졌을 때 (체인 풀렸을 때)

요즘 따릉이 타고 출근을 하고 있다. 따릉이를 출근에 이용한지 5일 정도 된 오늘, 출근하다 한강 자전거도로 한복판에서 체인이 빠져버렸다. 이전에 따릉이 탈 때도 가끔 그런 적 있지만, 이번엔 회사에 지각이라도 할까봐 다급한 상황이었다. 대여소가 가까우면 가서 반납하고 다른 걸로 빌리는 게 가장 편하지만, 여의치 않은 상황에는 직접 체인을 다시 끼울 수 있다면 좋다. 그래서 나도 자전거는 잘 모르지만 어떻게든 회사에 늦지 않기 위해 따릉이 체인 끼웠던 경험담! 따릉이 타다 체인 빠졌을 때, 체인 풀렸을 때 체인 다시 끼우는 법! (근데 워낙 경황이 없다보니 사진을 못 찍었다.ㅠㅠ 다음에 기회가 되면 사진 추가하겠습니다.) 일단 자전거가 지나가지 않는 안전한 곳에 자전거를 잘 세우고, 주로 체인이 빠지면 ..

일상/2020~2022 2020.03.24

비타민C

평생 비타민이나 영양제를 제대로 꼬박꼬박 챙겨먹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는데(가끔 부모님이 챙겨주거나 한 것들이 눈에 띄면 먹기도 하지만 그런 걸 내 돈 주고 사지도 않고 매일같이 꾸준하게 먹는 건 항상 실패해왔다) 후배 D가 취직선물로 준 비타민은 매일 한 포씩 먹고 있다. 비타민C라서 딱히 건강 생각해서라기보단 그냥 맛있어서라도 먹게 되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꾸준히 먹어본 건 처음이다. 카카오 캐릭터가 그려진 귀여운 통에 담겨있는 녀석이라 보기만 해도 이쁘다. 무엇보다, 취직했다고 이런 선물을 보내주는 D의 다정한 마음이 생각나서 좋다. 매일 이 비타민을 챙겨먹는 게 몸에도 좋겠지만 마음에도 매일 상큼한 기쁨을 주고 있다. 어쩌면 그쪽이 더 메인일지도.

일상/2020~2022 2020.03.21

사고 치다

몹시 다행하게도 더 큰 사태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한 주동안 대형사고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을만한 사고를 두 번이나 쳤다. 나름대로 확인을 한다고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솔직히 나도 아직 완벽히 파악이 되진 않았지만, 내 실수인 건 확실하다. 다른 건은 안일하게 생각해서 생긴 문제도 분명 있다. 더 조심스럽게 생각해야하고 더 꼼꼼하게 한번 더 살펴야한다. 아무리 다른 일들이 밀려오고 마음이 급하고 여러 일을 한꺼번에 처리해야한다고 해도. 처음이니까, 미숙하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기본을 놓치면 안 된다. 마음가짐의 문제도 있다. 빨리빨리 처리하는 것보다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하자. 또 실수에서 배우자. 뭘 배웠는지, 뭘 잘못했는지, 어떻게 해결했으며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될지 잘 기록해두자. ..

일상/2020~2022 2020.03.21

컴퓨터 설치

다니는 회사에 분명 '프로그래머'로 취직을 했는데 이번주엔 프로그래머보단 컴퓨터 수리기사에 가까웠다. 프로그래머야 기본적으로 컴퓨터에 관심이 있는 편이니까 다른 직원들에 비해 하드웨어적인 부분도 조금 더 친숙하기야 하겠지만, 내가 다른 직원들 컴퓨터 봐주고, 컴퓨터 설치하는 일 하러 취직한 건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해야하지 싶은 생각은 들었다. 물론 IT지원팀이 따로 있는 큰 회사도 아니고 체계도 별로 없고 그냥 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는 식이긴 하지만, 사실 난 할 줄 아는 사람의 범주에 들어가기 어렵다. 근데도 시킨다. 시키면서 왜 이렇게 못하냐고 한다. 솔직히 그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하면 새로 고용을 하든가, 그냥 있는 사람 중에 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는 거면 나보다 잘하는 본인들이 하시든가하면 될텐..

일상/2020~2022 2020.03.21

씀씀이

월급일이 10일이라 아직 첫 월급을 받으려면 3주나 남았는데 벌써 씀씀이가 커진 게 느껴진다. 큰일이다. 심지어 첫 월급을 받아도 다이소에서 알바하던 때보다 대단히 드라마틱하게 늘어나는 정도도 아닌데, '월급 나올 거니까'라는 생각이 구매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몹시 낮추고 있다. 그나마 신용카드없이 살아서 이 정도지, 왜 사람들이 신용카드의 늪에 빠지는지 아주 잘 알겠다. 어차피 월급 나올 거니까, 가 주는 안정감이 참 좋지만 이런 함정이 몹시 가까이 있네. 필요하다고 느끼는 뭔가를 사는데 있어 망설임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먹을 것도 막 사고. 절대 없는 돈을 쓰진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 월급날까지 버틸 수 있을지 슬슬 아슬아슬해지고 있다. 아직은 낭비의 수준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낭비하고 싶어..

일상/2020~2022 2020.03.20

집에서 먹는 저녁의 행복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니까 집에서 저녁 먹는 시간이 무척 소중해졌다. 6시에 바로 퇴근하면 그나마 7시반쯤엔 먹을 수 있지만, 늦게 퇴근하면 8시, 거의 9시 가까워서 먹게 될 때도 있다. 일찍 퇴근해서 하우스메이트와 함께 저녁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몹시 행복하다. 송파에서 성북동까지 퇴근하는 나 못지 않게 동네에서 일하는 하우스메이트도 늦게 들어오는 일(저녁 일정이 있는 일)이 잦아서 함께하는 저녁식사가 매일 성사되진 않는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소중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매일 여유시간이 넘칠 때는 그 여유시간동안 무기력과 우울에 빠져지냈다. 그러나 여유시간이 적어지니까 역설적으로 더 그 시간이 소중해지고 그 시간을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즐기려고 한다. 물론 직장에 있..

일상/2020~2022 2020.03.20

따릉이 출근

전에 MBC 김민식 PD님의 자전거 출퇴근 얘기를 재밌게 읽은 적이 있다. 이번에 취직하고나서도 잠깐 자전거 출퇴근을 생각해봤는데 도저히 너무 먼 것 같아서 엄두는 안 났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가는지 한번 보기나 할까? 싶어서 카카오맵에 자전거로 회사까지 찍어봤더니 예상소요시간은 1시간 18분이 나오고 붉은색으로 표시된 자전거도로 구간이 꽤 길었다. 물론 자전거도로를 우선으로 타려다보니 약간 돌아가는 구간이 생기긴 하지만, 일반도로에서 차랑 같이 달리는 것보단 조금 돌아가더라도 자전거도로로 가는 게 나아보였다. 그게 안전하고, 신호도 덜 걸리고, 매연도 덜 마시고, 무엇보다 자동차에 신경 곤두세우면서 타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몸도 마음도 훨씬 낫다. 주로 물길을 따라 자전거도로가 형성되다보니 집에서 출..

일상/2020~2022 2020.03.19

시저는 죽어야 한다

오랜만에 영화를 봤다. 영화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자주 보게 되진 않아서, 1년동안 보는 영화가 몇 편 안 될 정도다. 이 영화도 D가 적극 추천하지 않았다면 있는지도 몰랐을 거다. 제목은 '시저는 죽어야 한다'로, 한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이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를 함께 연습해서 연극 공연을 해내는 과정을 찍은 영화다. 실제로 진행된 것들을 찍은 거니까 다큠넨터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을 대충 알고 봤는데도 초반에는 등장인물들이 너무 배우 같아서(내게 익숙하지 않은 서양인의 외모라 더 그렇게 보였을까), 후반에는 꼭 잘 짜여진 이야기 같아서 실화라는 걸 자꾸 잊게 됐다. D가 얘기했던대로 그저 연극 오디션을 보고 연습을 하고 무대에서 실제로 연극하는 모습을 쭈욱 보여준다. 러닝..

일상/2020~2022 2020.03.17

댓글

어떤 글을 보면 어쩐지 예전의 내가 쓴 것처럼 느껴져서, 온 마음을 다해 응원의 댓글을 달게 된다. 그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자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내가 두드린 몇 글자들로 위로받았다고 할 때는 또 얼마나 뿌듯하고 감동적인지. 내 삶이 더 이상 나아지지 않을 거라 믿었을 때, 뿌리깊은 우울과 무기력감에 시달렸지요. 하지만 결코 과거가 미래를 결정하진 않더군요. 대학교에 갔지만 결국 그만뒀고, 활동가로 살았지만 그만뒀고, 결혼을 했고 돌이킬 수 없다 느꼈지만 결국 이혼했고, 서울이 싫어서 다신 돌아오지 않겠다며 떠났는데 다시 서울로 왔네요. 인정합니다. 불안한 삶이에요. 안정과는 거리가 멀고 저도 제가 잘 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나쁘진..

일상/2020~2022 2020.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