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392

갑작스럽게 찾아온 기회

프로그래밍을 가르쳐주던 형이 갑작스레 '사람 구해달라는 데가 있는데 해볼래?'하고 얘기했다. 사이트를 관리하는 업무인 것 같은데, 문제는 구체적인 게 하나도 없었다. 구체적인 업무가 뭔지, 소속팀이 어딘지, 어느 정도 규모의 기업인지, 어떤 분위기인지, 근무시간은 언제부터 언제인지, 야근은 얼마나 하게 될지, 월급은 얼마나 주는지, 근무를 언제부터 시작한다는 건지, 어떤 능력이 필요한지 하나도 몰랐다. 회사 이름과 홈페이지, 사무실 주소 정도는 나와서 검색해보니 집에서 가려면 적어도 1시간 20분이 걸리는 곳이었다. 어떻게 타도 지하철 3개 호선을 거쳐야하는 곳이라니 시작도 하기 전에 출퇴근할 걱정부터 됐다. 게다가 31년동안 건드려본 적도 없는 분야에 다른 사람 추천으로 들어가서 내가 업무를 제대로 소..

일상/2020~2022 2020.02.18

어느 일요일 일기

어느 일요일, 누군가 밥을 해준다는 것 어제 일요일엔, 일주일 내내 하우스메이트들이 해주는 밥만 얻어먹은 것 같아서 이번에야말로 내가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날 스윙댄스 뒤풀이 갔다가 버스가 끊겨서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따릉이를 타고 자정이 넘어 집에 왔으나 제일 먼저 일어났다. 처음엔 김치찌개를 생각했는데, 김치냉장고도 없는 우리 집에는 김치가 그리 많지가 않다. 지금 그나마 있는 김치들도 담근지 얼마 되지 않은 것들이라 찌개에 적당하지도 않았다. 뭐 할까 고민하며 냉장고 속을 뒤져보니 브로콜리와 버섯 몇 종류가 보이고 계란이 잔뜩 보였다. 결국 메뉴는 프리타타로 결정! 프리타타는 서양식 계란찜같은 요린데 기본적으로 계란찜이다보니 그리 복잡할 건 없어보였다. 최근에 요리를 가장 많이 하는 하우..

일상/2020~2022 2020.02.17

프로그래밍

요즘 프로그래밍을 공부하고 있다. 아직 막 시작한 초보단계이긴 한데, 나름으로는 앞으로 먹고 사는 일까지 고려한 진지한 마음이다. 중학생이던 시절 꿈이 프로그래머였던 적이 있다. 오랜 시간동안 손도 대본 적 없이 살아온 완전한 미지의 영역이지만 해보고 싶었던, 동경하던 일 중 하나였던 것만은 진심이다. 나는 머리로는 창조적인 일, 새로운 걸 만드는 일을 하고싶다고 생각해왔지만 냉정하게 돌아보면 그래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일단 손재주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서 손으로 뭔가를 직접 만드는 건 자신이 없다. 시도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뜨개질로 목도리도 떠봤고, 동네에서 목공 수업 들으며 의자도 만들어봤다. 내가 해온 일 중 그래도 뭔가 새로운 걸 만드는 일이라고, 창조적인 일이라고 할만한 것은 글..

일상/2020~2022 2020.02.15

내가 돈이 없지, 낭만이 없냐

해피 발렌타인, 이라며 동생이 아침부터 용돈을 보내왔다. 예나 지금이나 늘 모자란 나를 챙겨주고 아껴주는 어른스러운 동생이다. 난 요즈음 어쩌다 내 동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얘기하곤 한다. 처음 그런 느낌을 받았을 땐 나조차도 낯설었는데, 갈수록 더 진심이 되어가고 있다. 나와는 달리 그는 정말 어른이다. 난 발렌타인같은 건 별로 신경쓰지 않지만 다이소에서 일하다보니 모르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근데 발렌타인 선물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음주면 조카(동생의 딸)의 생일인데, 발렌타인도 챙겨주는 동생을 위해 난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 마음이 영 좋지가 않다. 동생에게 받은 용돈으로 뭘 할까 하다가 꽃을 샀다. 사실 그게 아니어도 사려고는 했는데, 용돈이..

일상/2020~2022 2020.02.14

익숙한 우울, 익숙한 무기력

채용면접에서 한번 탈락한 것 뿐인데, 또 다시 익숙한 우울감과 익숙한 무기력감에 빠져들려고 하는 나를 지켜본다. 어떻게 보면 거의 우울하길 원하는 사람처럼 그 감정에 젖어들려고 하고, 위로받고 싶어하고 있다. 그리고 많이들 위로해줬다. 위로가 나쁜 건 아니지, 그건 너무 좋지만. 그렇지만 달라지고 있는 나도 바라본다.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고, 거기에 필요 이상으로 빠져들지 않으려고 하고. 익숙한 사고의 흐름, 패턴을 끊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도 역시 있다. 갖고 싶은 습관을 습관으로 만들자. 어제와는 다르게 오늘을 살자. 생각도, 행동도. 그곳에 채용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내 삶이 실패한 것도 아니고, 내가 실패자인 것도 아니다. 당연한 소릴. 내겐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한가보다. 아직은 그렇게 긴 시간..

일상/2020~2022 2020.02.14

면접 후기

면접을 보고 왔다. 프로젝트 매니저로 서울시에서 위탁 받아 운영하는 청년공간을 관리하고, 공간 이용자들과 관계를 맺고 또 이용자들끼리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을 주로 할 사람을 뽑고 있었다. 그밖에도 공간을 꾸민다거나 행사를 기획한다거나 근처 지역에 있는 이웃 공간들, 단체들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고 함께할 수 있는 일을 찾는 일도 한다. 또한 중요한 사업운영 목표 중 하나는 이용자들이 단순히 이용하는 사람으로 남는 게 아니라 주체성을 갖고 스스로 운영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그를 통해 많은 청년들이 자기 삶의 현장에서, 또한 정치적으로 단순히 어떤 대상이 아니라 자기 목소리를 스스로 낼 수 있는 주체임을 인식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나는 받아들였다. 지난번 채용설명회 비슷한 행사에 갔..

일상/2020~2022 2020.02.13

새 학기 시즌

새 학기를 맞이하는 시즌이 됐다. 다이소 얘기다. 오늘 아침엔 비가 조금씩 내리는 가운데 노트 종류가 한가득 들어왔다. 다이소 상하차 아르바이트하면서 가장 무거운 물건이 A4용지, 노트같은 종이류와 세제 등의 액체류다. 번외로 아령, 자갈, 모래, 흙(각각 어항, 고양이화장실용, 화분이나 텃밭용 등이다) 종류도 있다. 종합장과 노트와 A4용지와 스케치북들을 나르면서 지금 시급 만원 어치를 넘어서는 노동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또 충격적일 만큼 많이 들어온 물건이 앉은뱅이 책상/밥상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접이식 좌식테이블 정도 된다. 이 물건이 많이 들어오면 힘든 이유가 일단 이 녀석 진열되는 층이 지하다. 우리 매장은 지하 1층부터 4층까지 총 5개 층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유일하게 지하..

일상/2020~2022 2020.02.12

14년의 시간을 지나

2006년 4월 27일, 나는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교통사고였다. 그때 내가 17살이었는데, 31살이 됐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29살이셨을 테니까, 그 나이도 지났다. 이젠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 아련하게 먼 기억으로만 남아있다. 처음엔 마지막으로 얼굴 봤을 때 더 따뜻한 말이라도 건네지 못했던 걸 많이 후회하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솔직히 일상을 살면서 아버지를 떠올릴 일이 그렇게 자주 있지도 않다. 살아계신 어머니께도 여전히 잘해드리는 것 하나 없는 불효자식이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지금, 우린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내가 기억하는 그는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사람 좋은 사람, 법 없이도 살 사람, 그의 친구나 주변 어른들도 종종 그런 식으로 그를 추억하는 걸 본다. 경제적으로는 그리 좋지 않..

일상/2020~2022 2020.02.10

영국식 설거지

영국식 설거지 영국사람들은 싱크대에 물을 어느 정도 받은 다음, 거기에 세제를 풀어놓고 밥 먹고 나온 그릇을 거기 담가둔다. 그리고는 수세미로 거기 담겨 있던 그릇을 닦으면서 그 물로 그냥 헹궈서 꺼내놓는다. 그게 끝. 흐르는 물로 헹구거나 하지 않냐고 했더니, 영국은 물값이 겁나게 비싸서 대부분이 그렇게 물을 최소로 쓰는 설거지를 한다고 한다. 한국인 친구가 와서 설거지 해주겠다고 한국식으로 설거지했다가는 니가 지금 얼마를 낭비하고 있는지 아냐는 소리를 들을 것이란다. 물값이 비싼 게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물을 낭비하지 않게 하는 데는 최고의 방법일 수는 있겠다.ㅠㅠ

일상/2020~2022 2020.02.09

빅피쉬

백만년만에 뮤지컬이란 걸 봤다. '빅피쉬'라는 작품이었다. 같이 본 사람은 팀버튼 감독의 영화에 비해 아쉬웠다고 하는데, 나는 영화를 안 봐서 비교할 길이 없었다. 사실 지난밤에 5시간도 못 잤고, 새벽에 다이소 알바하고나서 낮잠도 못 자고 저녁 8시에 보러 가는 바람에 약간 졸리긴 했지만 그럼에도 배우들이 신나게 노래 부르고 춤 추니까 나도 신나서 재밌게 봤다. 스토리는 고전적인 남성 위주의 서사(남자주인공들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아들은 아빠 삶의 진실과 업적을 찾아 떠나고 사랑하는 여자를 얻기 위해 뭐든지 하고, 여자주인공들은 사랑을 약속했던 남자가 지멋대로 떠나도 그저 기다리거나 이미 약혼자가 있는데도 남자가 와서 넌 내 운명이라고 다짜고짜 데려가버린다거나(?))라는 점이 아쉽긴 했지만. 며칠 뒤..

일상/2020~2022 2020.02.09

변화

최근 두 달 사이, 삶의 많은 부분을 바꾸었다. 사는 곳, 일하는 곳, 함께 사는 사람, 만나는 사람들까지, 내 삶을 둘러싸고 있던 거의 모든 것을. 분명히 그런 외부환경들의 변화는 내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냈냐고 하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기도 했다. 여전히 이전의 삶에서 반복하고 있던 생각의 패턴과 익숙한 감정들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습관적인 생각과 습관적인 반응, 습관적인 감정들은 내 몸과 마음의 상태를 이전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게 만들고, 그 생각 패턴들과 몸으로 따지면 호르몬 반응 등이 계속 이전과 비슷한 감정상태, 우울과 무기력에 나를 머무르게 하고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결정들을 내리게 한다. 그 결과 계속 나를 과거에 살게 만든다. 더 이상 과거에 살..

일상/2020~2022 2020.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