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어느 일요일 일기

참참. 2020. 2. 17. 06:28

어느 일요일, 누군가 밥을 해준다는 것

어제 일요일엔, 일주일 내내 하우스메이트들이 해주는 밥만 얻어먹은 것 같아서 이번에야말로 내가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날 스윙댄스 뒤풀이 갔다가 버스가 끊겨서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따릉이를 타고 자정이 넘어 집에 왔으나 제일 먼저 일어났다. 처음엔 김치찌개를 생각했는데, 김치냉장고도 없는 우리 집에는 김치가 그리 많지가 않다. 지금 그나마 있는 김치들도 담근지 얼마 되지 않은 것들이라 찌개에 적당하지도 않았다. 뭐 할까 고민하며 냉장고 속을 뒤져보니 브로콜리와 버섯 몇 종류가 보이고 계란이 잔뜩 보였다. 결국 메뉴는 프리타타로 결정!

프리타타는 서양식 계란찜같은 요린데 기본적으로 계란찜이다보니 그리 복잡할 건 없어보였다. 최근에 요리를 가장 많이 하는 하우스메이트 G가 시금치 프리타타를 요리해줘서 알게 됐다. 우선 계란 4개를 풀어 계란물을 만들고 우유 약간과 소금간을 했다. 브로콜리, 버섯, 당근 등 넣고 싶은 야채들을 잘라서 씻어놓고 기름에 마늘을 먼저 볶았다. 그 다음 야채들을 넣어 야채의 물기가 날아갈 때까지 볶고 불을 약불로 줄인 다음 거기에 아까 만들어놓은 계란물을 부었다. 처음 1분에서 2분 정도는 넣은 계란물을 잘 저어주다가, 치즈를 넣고 뚜껑을 닫고 가장 약한 불에서 10분 정도 익혔다.

결과는 실패! 지난번에 얻어먹었던 것만큼 노란 모습이 나오지 않고 아래가 좀 눌어붙었다. 오목한 팬 말고 그냥 납작하고 평평한 팬에다가 할 걸 그랬다. 너무 안 예뻐서 사진도 안 찍었다. 그래도 그럭저럭 먹을 수는 있는 반찬이 됐다. 다들 군말없이 먹었다. 그래, 뭐, 프리타타는 처음 해보는 요리였으니까. 아, 그나저나 빨리 먹어야하는 두부가 계속 신경 쓰인다.

그렇게 아침 한 끼를 먹고, 차를 마시고, 땅콩을 깠다. 언니네텃밭에서 보내준 땅콩 두 봉지 까는데 G와 둘이서 거의 40분이 걸렸다. 그리고나서 거실을 청소하고, 같이 땅콩 까던 사람은 땅콩을 볶고, 그랬더니 점심시간이 됐다. 아침 먹고 돌아섰더니 점심이다. 이것이 집안일인가!

점심까지 먹고나자 노곤해져서 늘어져 자버렸다. 자고 일어나서 공부하겠다고 컴퓨터 켜놓고 공부하는 시간보다 유튜브 잠깐 본 시간이 더 긴 것 같은데, 그러다 저녁시간이 됐다. 잔뜩 샀던 누네띠네를 거의 다 먹고는 밑에 부스러기가 남았는데 다른 하우스메이트 M과 그걸 달지 않은 시리얼과 함께 섞어서 우유에 타 먹었다. "우리가 누네띠네 부스러기를 이런 식으로 먹을 거란 걸 누네띠네 과자를 만든 사람은 생각해본 적 있을까?"

그러고도 뭔가 아쉬워서 결국 아침에 남은 밥으로 간장계란밥을 해먹자고 얘기가 됐다. 근데 같이 있던 M이 자기가 하겠다고 해서 내가 뭘 도와주면 되겠냐고 했더니 그냥 가만히 앉아있어도 된다고 했다. 안 그래도 맨날 얻어먹는 것 같은데 이렇게 옆에서 요리하는데 또 난 가만히 있으면 "내가 너무 쓰레기가 된 것 같다"(사실 그 하우스메이트가 과자 많이 먹을 때 자주 하는 말)고 했더니, "뭘 또 그렇게까지"라며,

"꼭 뭘 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꼭 뭔가 기여를 하지 않아도, 그저 가만히만 있어도 당신이 여기 있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는 사람도 있는 거지. 기본소득도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꼭 사회를 위해 뭔가를 해서가 아니라 그저 이 사회에 함께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는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라고 하는 의미니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사람, 위로가 되는 사람. 그 말이 너무 따뜻했다. "이게 뭐 요리라고."하면서 순식간에 완성된 간장계란밥. 내가 일어서기도 전에 테이블세팅 다 하고 먹고나서 설거지까지 다 해버리는 사람. 꽃에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이유로 건조한 인간이라고 놀렸던 3일 전의 나를 규탄한다. 누군가 밥을 해준다는 게 이렇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일일 줄 매일같이 할머니, 어머니 밥을 얻어먹던 어린 시절엔 정말 몰랐지. 아무 약속도 없이, 그렇게까지 바쁜 일도 없이, 이렇게 지나가는 어느 따뜻한 겨울의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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