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발렌타인, 이라며 동생이 아침부터 용돈을 보내왔다. 예나 지금이나 늘 모자란 나를 챙겨주고 아껴주는 어른스러운 동생이다. 난 요즈음 어쩌다 내 동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얘기하곤 한다. 처음 그런 느낌을 받았을 땐 나조차도 낯설었는데, 갈수록 더 진심이 되어가고 있다. 나와는 달리 그는 정말 어른이다. 난 발렌타인같은 건 별로 신경쓰지 않지만 다이소에서 일하다보니 모르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근데 발렌타인 선물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음주면 조카(동생의 딸)의 생일인데, 발렌타인도 챙겨주는 동생을 위해 난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 마음이 영 좋지가 않다.
동생에게 받은 용돈으로 뭘 할까 하다가 꽃을 샀다. 사실 그게 아니어도 사려고는 했는데, 용돈이 마지막 고민마저 날려준 셈이 됐다. 발렌타인 기념이라기보단 어제 본 채용면접 탈락 기념에 더 가깝다. 거절과 실패의 일상에 꽃 한 송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실은 지난 번에 누군가에게 장미꽃을 선물했는데, 문득 나는 꽃을 줄 일은 있어도 받을 일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랬는데 최근에 듣는 팟캐스트에도 꽃집주인분이 게스트로 나오셔서 꽃 얘길 한참 듣게 됐다. 나 자신을 위해 꽃을 산다는 건 나도 처음 해보는 일이라 무척 어색했다. 그냥 집에 꽂아두려고 한다고 하니 프리지아를 추천해주셨다. 4천원이었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프리지아의 꽃말 중엔 '새로운 시작을 응원합니다'도 있다고 한다. 은근히 의미심장하다.
꽃을 사며 떠올린 이야기가 있다. 내가 존경하는 또 다른 분으로 '황안나' 선생님이 계신데, 그분의 실수담과 살아온 이야기를 모아 엮은 <안나의 즐거운 인생비법>이란 책에 나오는 이런 구절이다.
'월급날이 되면 갚을 빚 갚고 몇 푼 남지 않은 돈으로 지금은 없어진 종로서적에 들러서 시집도 한 권 사고 경동시장에 들러 팔다 남은 떨이 장미를 한 단 사는 것도 내가 누린 호사였다. 남들은 그랬을 거다. 그 지경으로 살면서 시집이라니, 장미꽃이라니! 실제로 나를 보고 어이없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 낳고도 연탄 한 장 없어 냉골에서 지내고, 쌀이 없어 메주콩을 불려 배를 채우고, 그 후로도 20년이 넘도록 빚 갚는 일은 계속 되었지만, 그 길고도 어두웠던 시절을 절망하지 않고, 웃음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건 그런 여유를 부릴 줄 아는 낭만의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
돈이 많고 적음도 우리를 슬프게 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슬픈 일은 그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일 게다.
...
멋 내고 살자. 돈이 있어야 멋 부릴 수 있는 거 아니다. 시간이 많아야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내면 된다.'
읽은지 몇년이나 지났는데도 바로 그 생각이 났다. 나도 생각했다. '그래, 내가 돈이 없지, 낭만이 없냐.' 돈이 없단 생각에 자꾸만 마음도 가난해지고 있는 요즈음이었는데, 오늘 아침 식탁에 꽂아놓은 노란 프리지아 한번 쳐다보면 그래도 마음이 한결 나아지는 게 신기하다. '나를 사랑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도대체 그런 건 어떻게 하는 거냐는 의문을 지우지 못했는데 이런 걸까 싶기도 하고. 나는 내가 딱히 사고 싶은 것도 원하는 것도 별로 없는 줄 알았는데 꽃 몇 송이 사고 이렇게 기분 좋아지는 나 자신을 보고 있자니 묘한 느낌이다. 이렇게 서른한 살의 나를 조금씩 더 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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