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392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보낸 설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주 조용하게 혼자서 설날을 보냈다. 그래도 아침밥은 하우스메이트 기민과 함께 먹었다. 기민이 본가에 가고 난 뒤에는 큰아버지, 큰어머니와 고모 대신 사촌 누나와 형에게 전화해서 이혼하기로 결정한 사실을 알렸다. 다행히 본인들도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사촌 누나와 형은 모두 내 결정을 지지해주었다. 평소 그렇게 자주 연락하는 사이도 아니니 몹시 갑작스러운 소식이었을텐데도 내 결정에 대해 의문이나 판단을 하지 않았다. 니가 충분히 고민하고 내린 결정일 거라 믿는다고, 니가 제일 속상할 거라고 마음 잘 추스리라고 말해주었다. 어르신들께는 잘 얘기해두겠다고도. 어머니도, 동생도, 친구들도 많은 사람들이 따뜻하고 걱정 어린 시선으로 응원하고 지지해주어서, 뭐라 말할 수 없을만큼 힘이 된다..

일상/2020~2022 2020.02.05

기분이 널을 뛴다.

기분이 널을 뛴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데 페북에 글을 남기는 건 내려갔을 때가 더 많은 것 같기도. 지금은 올라가고 있다. 사실, 정말로 내려가있던 오랜 기간동안엔 페북에 글조차 못 썼다. 시선도 신경 쓰이고 그럴 에너지조차 없고 내 안에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도 않았고, 여러모로. 우울한 글 읽는 거 피곤한 일인 거 아는데 읽어주시고 심지어 반응까지 해주시는 페친분들이 계셔서 너무 고맙다. 어제 맛있는 피오니 딸기케익도 먹었고, 같이 사는 사람들 넘 좋고, 그냥, 아직 이런저런 감정도 느끼고 그러는 게 오늘은 즐겁게 느껴진다. 여전히 처리해야할 일도 있고 귀찮고 돈도 없지만ㅋㅋ 참, 책을 더 읽어야겠다. 그 생각을 했다. 적어도 책을 읽는 동안엔 거기에 빠져들 수도 있고 좋은 책은 확실히 조금씩 나..

일상/2020~2022 2020.02.05

나의 종교

나의 종교 매주 1편, 나는 어떻게 하면 글을 쓸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몇 번이나 반복해왔는지 모른다. 거의 열 번은 넘었을 다짐과 길어야 두세 달이었던 내 꾸준함이 정말 싫었다. 그나마 돈을 받고쓰니까 좀 더 써지긴 했지만 그조차도 1년을 못 넘겼다. 최근 만난 사람 중에 평생 아무 종교도 갖고 있지 않다가 20대 중반에 누구의 소개도 없이 스스로 성당 문을 열고 들어가 천주교 신자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얘기를 본인 입으로 듣는데도 신기했다. 부모님이 스무 살 이전에는 어떤 종교도 강요하지 않겠다는 철학을 갖고 계셨단다. 그 사람이 현재 다니고 있는 성당에서도 다들 독특한 케이스라며 놀라워한다는 얘기도 덤으로 들었다. 하긴, 대개는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오니까 말이다. 어느 일요일에 그 얘길 돌이..

일상/2020~2022 2020.02.05

미안함

미안함 그 사람은 결국 눈물을 보였다. 상의할 사람도 없이 혼자서 일하고, 그 와중에 자기 월급을 자기가 걱정해가며 일을 해야하는 그런 직장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말없이 그의 어깨에 한손을 살짝 올리곤, 자꾸만 나오는 한숨을 너무 큰 소리가 나지 않게 내쉬었다. 내가 일하고 활동했던 이 단체는, 애초부터 수익구조가 선명한 기업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다수의 후원자들로부터 후원금을 매달 거둬들이는 그런 조직도 아니었다. 청년들이 우리끼리 모여서 우리 스스로를 돕자는 취지와 철학, 운영원리는 모두 훌륭했으나, 그걸 현실화시키는 과정에서 모든 게 이상대로 될 수만은 없었다. 결국 단체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려면 돈을 받고 상근으로 일하는 사람이 필요한데, 그 사람에게 적절한 월급을..

일상/2020~2022 2020.02.02

온 몸이 가렵다. 긁어서 피부가 빨갛게 부어올랐다.

어제 저녁으로 떡볶이를 먹었는데, 그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만 하루가 지나도록 온 몸이 가려워서 계속 긁고 있다. 긁은 곳들은 피부가 다 빨갛게 올라오고. 뭐가 문제지? 30년이나 이 몸을 데리고 살았는데 아직도 내가 뭘 먹고 이렇게 온 몸이 가려워지는지 감을 전혀 못 잡고 있다는 게 새삼 안타깝다. 내가 아니라면 아무도 알려줄 수 없는 나 자신과 미래에 대해서 어떨 때는 의사든, 누구든 넌 이러하고 저러하니까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 라고 말해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게 된다.

일상/2020~2022 2020.01.28

예언

예언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당신은 행복한 생각에 잠길 것이다. 혹시 '자기 실현적 예언'이란 말을 들어보았는가? 이는 예언의 영향으로 인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일이 예언대로 되는 현상을 말한다. 즉, 예언 자체의 힘으로 그 예언의 내용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유명한 부자나 주식투자 전문가가 이 회사의 주가는 오를 것이라 얘기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해당 주식을 살 것이며 결과적으로 주가는 올라갈 것이다.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가 올해에는 분홍색이 유행할 것이라 말한다면 당장 의류 생산업체들부터 분홍색 옷을 잔뜩 생산하기 시작할 것이다. 소비자들도 그 말을 듣고 분홍색 옷을 사는 경향이 시작된다. 나중엔 정말로 상점에는 분홍색 옷들만 잔뜩 팔고 있고 주변에도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일상/2020~2022 2020.01.28

헤어지다

헤어지다 2020년 1월 21일, 지난 2016년부터 같이 살았던 사람과 이혼에 합의했다. 이틀 뒤인 23일엔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에 이혼신고서도 제출하러 갔다. 필요한 서류를 다 뽑아서 제출했더니 3월 9일에 다시 같이 오라고 했다. 그때는 우리 둘 다 강릉에 살지 않을 예정이라 아무래도 출석이 어려울 것 같아서 내 주소지가 있는 서울의 법원에서 다시 신청하기로 했다. 우리에겐 아이도 없고, 가진 재산도 거의 없는 데다 어쨌든 둘이 이혼하자는 것에 서로 동의한 상황이다보니 생각보다 절차가 복잡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찾아봤던 것보다 더 간단한 것을 보니 절차가 점점 더 간소해지는 것 같다. 미국에서의 이혼 과정을 아프게 보여주는 영화 '결혼 이야기'같은 끔찍한 일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참 다행이라..

일상/2020~2022 2020.01.26

내게도 제자리가 있을까

내게도 제자리가 있을까 요즘 하루 3시간씩 다이소에서 일하고 있다. 내가 다이소에서 하는 일은 아침에 도착한 물건을 차에서 내리고 분류하여 그 물건이 진열되어있는 곳에 갖다두는 일이다. 지하 1층부터 4층까지 5개의 층, 층 내에서도 어떤 물건들이 어디에 진열되어있는지를 잘 파악해야한다. 일한지 3주쯤 되니 이제 대충 절반 이상은 박스에 쓰인 이름만 봐도 대충 어느 층의 어디 즈음인지 느낌이 온다. 물론 여전히 헷갈리는 상품들도 많다. 분명히 수첩이지만 수첩과 함께 진열되어있는게 아니라 그 수첩에 그려진 캐릭터를 중심으로 해당 캐릭터 상품을 전부 모아놓은 특별매대에 진열되어있다거나, '득템코너' 등 특정한 테마나 계절상품을 중심으로 모아놓은 매대에 있는 상품들도 있다. 그런 매대들은 일단 일반적인 법칙을..

일상/2020~2022 2020.01.19

돌아온 서울에서의 첫 일자리

다 끝나가던 2019년과 함께 내 귀촌생활도 끝이 났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 나름대로 구직활동을 했는데 풀타임으로 일하는 곳은 콜센터 제외하고는 다 떨어지고, 그나마 일하러 오라고 연락온 곳이 집에서 멀지 않은 다이소였다. 하루 3시간 파트타임, 소위 말하는 아르바이트 자리였다. 집에서 가까운 데다 아침 10시 전에 퇴근하는, 아침에만 잠깐 하는 일자리라서 일을 하면서 구직활동이나 다른 걸 배우는 일도 얼마든지 병행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알바몬 어플로 간단하게 지원했던 것 같은데, 채용 확인도 문자로 간단하게 왔다. 언제부터 출근 가능하냐는 문자에 내일부터 된다고 했더니, 내일 아침부터 나와달라는 문자 답장이 왔고, 그게 거의 전부였다. 면접은커녕 절차라고 할만한 게 전혀 없는..

일상/2020~2022 2020.01.19

점수에 목숨 거는 사람

점수에 목숨 거는 사람 시험을 보면 점수가 나온다. 게임을 해도 점수나 그 비슷한 게 나온다. 점수에 얽매이고 점수에 목숨 거는 게 싫었다. 세상에 정말로 소중한 일, 중요한 능력은 점수가 나오지도 않고 점수로 매기기도 어려운데, 맨날 단순지식 하나 더 외워서 점수 몇 점 더 맞는 식으로만 가르치고 배우는 게 한심했다. 직장에 들어가고나니 누가 점수 매겨줄 일이 없었다. 그저 할 일이 있을 뿐이다. 못하면 욕을 먹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로 못했는지, 어떻게 얼마나 개선해야하는지는 알아서 생각해야 한다. 사람 관계도 그렇다. 누가 내 첫인상에 대해 점수를 매겨주지도 않고, 내게 호감이 있는지, 반감이 있는지, 관심이 없는지 수치로 표기되지 않는다. 그저 분위기를 느끼고, 공감능력을 발휘해서 넘겨짚을 따름이..

일상/2013~2019 2019.11.15

아파서라도 가기 싫은 곳

학원에서 중학교 3학년생들에게 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내 반에는 운동하는 걸 좋아하고, 뭘 물어보면 수줍은 듯 어색하게 웃곤 하는 남학생이 하나 있다. 수업에만 들어오면 늘 지친 표정으로 졸리다고 하는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오늘 따라 온 얼굴에 활짝 미소를 띠고 발걸음도 가볍게 들어오기에 뭐 좋은 일 있냐고 물었다. "오늘 영어학원 안 가도 돼요." "왜?" "아파서요. 머리가 너무 아파요." 아프다고 말할 때에야 조금은 아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는데, 그게 웃겨서 웃어버렸다. 아프다는 녀석이 여태껏 봤던 어떤 건강한 때의 모습보다도 더 좋아보였던 것도 웃기고, 아픈 게 좋은 일이라고 대답한 것도 웃겨서 더 크게 웃었다. 그러나 웃음을 그치고 나서 생각해보니 웃긴 일이 아니었다. 아파서라도, 아파서라도..

일상/2013~2019 2019.11.07

강릉 일기

기분이 참 쉽게도 변한다.가르치는 학생들이 무슨 말을 해도 대답도 안하고 고개 숙이고 책만 쳐다본다. 그런 상태로 두 시간을 넘게 수업 하는데, 울고 싶은 마음이 됐다.이성적으로는 나도 학생 때 별로 다르지 않았다는 걸 기억하고, 나와 인간적인 교류가 전혀 없이 만난지 얼마 안 된 학생들이 설연휴 쉬다 수업들으려니 힘들고 귀찮고 공부에 지치고 그런 거 이해 되는데, 듣고 싶어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얘길 떠들자니 진짜 재미없다. 쟤들도 재미없겠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나 싶다.그냥 때려칠까 생각하면서 퇴근했는데 덥수룩하던 머리를 자르니까 의외로 기분이 나아졌다. 기분전환하러 머리를 한다는 말을 처음으로 이해했다.바꿀 수 없는 일에 집중하지 말자는 말도 도움이 됐다. 그래, 그들이 그런 상태인 건 내 잘..

일상/2013~2019 2019.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