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주 조용하게 혼자서 설날을 보냈다. 그래도 아침밥은 하우스메이트 기민과 함께 먹었다. 기민이 본가에 가고 난 뒤에는 큰아버지, 큰어머니와 고모 대신 사촌 누나와 형에게 전화해서 이혼하기로 결정한 사실을 알렸다. 다행히 본인들도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사촌 누나와 형은 모두 내 결정을 지지해주었다.
평소 그렇게 자주 연락하는 사이도 아니니 몹시 갑작스러운 소식이었을텐데도 내 결정에 대해 의문이나 판단을 하지 않았다. 니가 충분히 고민하고 내린 결정일 거라 믿는다고, 니가 제일 속상할 거라고 마음 잘 추스리라고 말해주었다. 어르신들께는 잘 얘기해두겠다고도.
어머니도, 동생도, 친구들도 많은 사람들이 따뜻하고 걱정 어린 시선으로 응원하고 지지해주어서, 뭐라 말할 수 없을만큼 힘이 된다. 이별은 늘 어려웠지만 이혼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여기에 엮여있는 그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고, 모든 게 너무나 거대하고 복잡하게만 보였다. 아이가 없음에도 그랬다. 무엇보다도 한때 그렇게나 사랑했던 사람과 나 자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좋은 이별은 없다고 하지만, 우리도 분명 그동안 주고받은 상처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이렇게 둘 모두 새로운 시작에 서게 됐고 서로 응원하면서 그렇게 나아가고 싶다.
나는 어릴 때 결혼을 빨리 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서울에서 일하면서 시골에 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내 학창시절을 시골에서 보냈기 때문에 시골에서의 삶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아는 줄 알았다. 나는 내가 결혼을 하고나서도 연애할 때와 별로 다를 것없이 살 줄 알았다. 난 항상 바보였고 저지른 뒤에도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시골에 살면서 오랫동안 내가 왜 이렇게 무기력하고 우울해하는지 고민해왔다. 얼른 답안지와 맞춰보고 싶은 그런 명쾌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서울로 돌아왔고, 학원강사를 그만두었고, 더 이상 그리 행복하지 않았던 결혼생활도 그만하기로 했다. 그 많은 시간들을 무기력 속에 흘려보냈는데, 지금은 거짓말처럼 바빠졌다.
이제 난 다음주 화요일까지 해낼 일, 다음주 금요일까지 해내고 싶은 일,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의 약속들과, 하는 게 너무 많아서 이건 그만둬야하나 싶은 일까지 갖고 있다. 잊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었을까. 난 아직도 날 잘 모른다. 그래도, 그동안 나를 좀 더 알게 된 거겠지. 그렇겠지.
여러모로 기념비적인 설날이다. 미안하고 두렵고 아프지만 설레는 맘이 더 크다. 어느새 서른하나가 되어버렸지만 다시 잘 시작하는 한 해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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