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내게도 제자리가 있을까

참참. 2020. 1. 19. 06:19

내게도 제자리가 있을까

 

요즘 하루 3시간씩 다이소에서 일하고 있다. 내가 다이소에서 하는 일은 아침에 도착한 물건을 차에서 내리고 분류하여 그 물건이 진열되어있는 곳에 갖다두는 일이다. 지하 1층부터 4층까지 5개의 층, 층 내에서도 어떤 물건들이 어디에 진열되어있는지를 잘 파악해야한다. 일한지 3주쯤 되니 이제 대충 절반 이상은 박스에 쓰인 이름만 봐도 대충 어느 층의 어디 즈음인지 느낌이 온다. 물론 여전히 헷갈리는 상품들도 많다. 분명히 수첩이지만 수첩과 함께 진열되어있는게 아니라 그 수첩에 그려진 캐릭터를 중심으로 해당 캐릭터 상품을 전부 모아놓은 특별매대에 진열되어있다거나, '득템코너' 등 특정한 테마나 계절상품을 중심으로 모아놓은 매대에 있는 상품들도 있다. 그런 매대들은 일단 일반적인 법칙을 따르지 않고, 주기적으로 생겼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상품 내용도 바뀌기 때문에 약간 더 까다로운 편이다.

 

박스에 적힌 이름만 봐서는 무슨 상품인지 도저히 모르겠을 때는 박스를 뜯어본다. 박스를 뜯어도 이게 대관절 어디에 진열해야하는 물건인지 모르겠을 땐 직원분들께 여쭤본다. 그렇지만 직원분들도 모든 상품에 대해 완벽하게 꿰고 있는 건 아닌 데다, 그때그때 진열하는 곳이 달라지는 상품도 있다보니 그럴 땐 한 상품을 들고 그게 어딧는지 찾아헤맬 때도 있다. 그래도 분명 어딘가에는 녀석이 있을 곳이 있다. 결국 들어오는 모든 물건엔 자기 자리가 있다. 어느 날은 그렇게 열심히 상품들의 자리를 찾아주다보니 문득, 내게도 '제자리'라는 게 있을까 궁금해졌다.

 

강원도 강릉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15년 정도는 거기서 큰 변화없이 쭈욱 살았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정신없이 옮겨다니기 시작했다. 대학교를 갔으나 2년만에 그만뒀고, 군대에 다녀왔고, 활동가로 일하면서 수원에서 수유로, 이문동으로, 정릉으로, 거의 매년 이사를 다녔다. 결혼을 했고 활동을 그만두면서 홍천으로 갔고, 거기서도 2년을 못 채우고 강릉으로 갔는데, 그 강릉에서 1년을 못 채우고 서울로 돌아왔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내 고향은 강릉이니 강릉에서 서울로 온 것을 '돌아왔다'라고 표현하는 게 이상한 일일 수도 있는데 자연스럽게 돌아왔다고 얘기하게 되는 걸 보니, 내 마음의 고향은 어쩌면 서울인가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자주 만나서 어떤 얘기든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서울에 거의 다 살고 있다는 느낌이다.

 

홍천과 강릉으로 갈 때는 배우자와 함께였지만 이번엔 혼자 돌아왔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와 함께 사는 생활에서 혼자인 상태로 돌아왔다. 아직 법적으로 이혼을 한 건 아니다. 그렇지만 따로 살아보니 점점 우리가 함께 살아야할 이유가 별로 없다는 게 더 분명해지는 기분이다. 따로 살고나서 관계는 좋아졌다. 얼굴을 보지 않으니 서로 싸울 일도 서운해할 일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종종 메신저로 좋은 얘기만 나누다가 한 달에 두어번 얼굴 보고 데이트하면 되는 그런 사이가 되어가고 있다. 아마 이대로 간다면 겉으로는 주말부부 비슷하고, 체감상으로는 오래된 장거리 연애 커플 정도의 기분을 느끼는 관계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게 내가 원하는 건지 정말 잘 모르겠지만 아니라는 쪽으로 더 기울고 있다. 사랑이 뭔지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 같지만, 혹시 그게 바라는 것없이 좋아하고 위하는 것이라면 난 그 사람에게 바라는 게 너무 많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결혼을 유지하고 싶은지, 이혼을 하고 싶은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고 싶은지, 오래된 관계들을 잘 돌보고 싶은지, 나는 사람 만나는 일을 좋아하는지, 혼자 하는 일을 좋아하는지, 도대체 지금까지 제대로 해낸 일이 뭔지, 할 줄 아는게 뭔지, 뭘 하고 먹고 살 수 있을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다. 아무것도 붙잡을 것 없는 낭떠러지 옆의 좁은 길 위에서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혼자 오들오들 떨고만 있는 기분이다. 내게도 제자리라는 곳이 있다면, 찾고 싶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이전보다 훨씬 낫지만 여전히 언제쯤 나아질지 모르겠는 내 생계문제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같은 것들이 내 일상의 너무 많은 부분을 뜯어먹고 있다. 부디, 내가 이 혼란과 불안 속에서도 여전히 작은 즐거움과 따뜻함들을 놓치지 않기를, 빗속에서도 춤을 출 수 있는 마음가짐이 내게 깃들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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