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헤어지다

참참. 2020. 1. 26. 01:02

헤어지다

 

2020년 1월 21일, 지난 2016년부터 같이 살았던 사람과 이혼에 합의했다. 이틀 뒤인 23일엔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에 이혼신고서도 제출하러 갔다. 필요한 서류를 다 뽑아서 제출했더니 3월 9일에 다시 같이 오라고 했다. 그때는 우리 둘 다 강릉에 살지 않을 예정이라 아무래도 출석이 어려울 것 같아서 내 주소지가 있는 서울의 법원에서 다시 신청하기로 했다. 우리에겐 아이도 없고, 가진 재산도 거의 없는 데다 어쨌든 둘이 이혼하자는 것에 서로 동의한 상황이다보니 생각보다 절차가 복잡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찾아봤던 것보다 더 간단한 것을 보니 절차가 점점 더 간소해지는 것 같다. 미국에서의 이혼 과정을 아프게 보여주는 영화 '결혼 이야기'같은 끔찍한 일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참 다행이라 느꼈다.

이혼에 대해 먼저 적극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사람도 나였고, 결국 먼저 이혼하자고 말을 꺼낸 사람도 나였다. 그런 고민을 하고 그런 말을 꺼내는 게 쉽진 않았다. 나는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실 난 나쁜 사람이다. 그걸 좀 더 인정하고 받아들여야하는데 여전히 그게 어렵다. 그렇게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어쩌다 이혼에 이르게 되었나. 나는 대체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이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나. 어쩌면 언젠가 나 스스로도 이 질문을 다시 던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2020년 1월의 나는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기록으로 남겨놓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사명감이 든다.

이혼을 고민하게 된 첫 이유는 행복하지 않아서였다. 지난 2년에서 3년의 기간을 돌아보았을 때, 내가 일상 속에서 점점 더 행복하지 않다고 느껴왔다. 문제는 나 자신도 내가 왜 그렇게까지 우울과 무기력에 빠져드는지 감을 못 잡았다는 것이다. 사실 거기에는 명쾌하게 하나로 이야기할 수 없는 다양한 원인들이 있었다. 그 중 커다란 것 하나는 홍천과 강릉이라는 우리가 살았던 곳들에는 내 친구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하다못해 내가 우울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털어놓을 친구조차 없는 채로 살았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에게 내 문제를 털어놓는 과정에서 스스로 그 문제의 실마리를 찾기도 하고 친구의 공감과 위로를 통해 힘을 얻기도 한다. 내게 그 역할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느꼈다. 그건 내가 우울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고, 내가 내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결혼생활도 둘 모두 꿈꾸었던 귀촌을 실현하면서 악화되기 시작했다는 게 아이러니다. 물론 상황이 좋진 않았다. 우리가 기대했던 시골집이 아니라 원룸에 살게 됐고, 길어야 반년 정도일 거라 생각했던 원룸 생활을 1년을 넘게 해야했다. 원룸 바로 앞엔 군부대가 있었고, 그 군부대에서 만들어내는 소음과 매연, 우리집 창문이 들여다보일 것 같다는 느낌 등도 영 싫었다. 농사 짓기 위해 얻은 밭도 집에서 꽤나 멀었다. 월세는 저렴한 편이었지만 우린 그 월세와 생활을 감당하기에도 소득이 부족했다. 우리는 돈은 적게 벌면서 대신 많은 자유시간을 확보하자는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했다. 임금노동을 덜하는 대신 농사를 지어 먹을거리도 자급하고 많은 것들을 돈 주고 사는 대신 직접 해내고, 그 시간들을 즐기자는 거였다. 그게 우리가 시골로 간 이유기도 했다. 난 최근에서야 내가 돈이 없다는 사실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지를 깨닫고, 인정할 수 있었다. 나는 이성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그런 삶을 지향했었지만, 어쩌면 나한테는 그게 잘 맞지 않았나보다.

돈이 없으니 나라도 주 5일 근무하는 일자리를 구할까 고민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 사람은 우리가 그러자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지 않느냐, 당신이 하고 싶으면 괜찮지만 당신은 정말 그런 일을 하고 싶으냐, 그렇게까지 벌지 않아도 자기가 좀 더 벌고 다른 방식으로 버는 걸 고민해보면 우리 생활엔 문제가 없을 거다라는 얘길 했다. 그 말들은 분명 맞는 측면이 있었고, 무엇보다 달콤했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봤을 때 결국 최저한의 생계에 필요한 돈을 어떻게든 조금씩이라도 더 벌어온 쪽은 나였다. 그 사람이 돈을 전혀 벌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우리가 번 돈은 언제나 둘이 살기엔 너무나 적은 돈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결혼했을 때 계좌를 합치지 말았어야했다. 이건 작년 여름이 끝나갈 때 즈음 이미 둘 다 공감한 내용이었다. 둘 중 한사람만 돈을 벌고 있더라도 다른 한쪽이 생활의 압박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는 차원에서 결혼할 때부터 우린 생활비를 합쳐서 관리했는데, 그러다보니 오히려 둘 다 위기감이 옅어졌다. 일종의 '공유지의 비극' 효과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공유하는 통장잔고를 보며 결국 그 위기감을 먼저 느끼고 어떻게든 조금씩이나마 안정적인 수입을 유지하려고 더 노력하게 된 쪽은 오랜 시간동안 나였다. 그 사람은 나보다 다섯 살이 많지만 서른이 넘어서까지도 부모님의 절대적인 경제적 지원 아래 살아왔고, 풍족하게 지내진 않았어도 적어도 월세를 못 낼까봐 걱정하는 종류의 위기감은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게 결혼하다고 갑자기 달라지진 않았다. 내가 하다못해 월 200만원을 안정적으로 벌어들였다면 내 일상이나 부부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달랐을까하는 생각도 최근에 종종 해보게 됐다. 경제적인 문제가 중요하다는 거야 당연히 알았다. 그럼에도 다들 돈 때문에 싸운다는 말을 난 진지하게 우리에게도 적용된다고는 믿지 않았고 또 믿고 싶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조금은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 꼭 돈 때문은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도 우리 관계가 더 힘들어졌다는 것을.

중간에 잠깐 배우자가 학교 스쿨버스 승하차를 돕는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그 일을 정말 많이 힘들어했다. 거의 매일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았으며, 내가 직장에 출근할 때는 전혀 우리 집에 없었던, 돈을 안 버는 쪽이 집안일을 더 해야한다는 말을 꺼냈다. 분명 내가 직장에 다닐 때는 자기가 집에서 일하고 돈을 좀 덜 번다는 이유로 집안일을 더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을 억울해했었던 것 같은데, 입장이 달라지니 생각도 달라졌다. 나도 아예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하루에 출퇴근 포함해서 3시간 정도 임금노동을 한다고 당당하게 내게 더 많은 집안일을 할 것을 요구한다는 게 난 싫었지만 싸우고 싶지 않아서 제대로 말을 못했던 것 같다. 그런 식으로 갈수록 더 많은 말들을 안으로 삼켰다. 싸우고 싶지 않았고 상처주고 싶지 않았고 또 말을 해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한번씩 그 사람이 내 말을 무시할 때마다 급격하게 내면화됐다. 그 사람은 더이상 내가 하는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나는 듣지 않는 사람을 위해 말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집에선 늘 그 사람이 온갖 일상적인 이야기를 떠들고 나는 그것에 반응하는 식의 대화만 남았다. 그 사람은 나와의 관계에서도 충족되지 않고 주변에 친구가 많이 없어서 충족되지 않는 것들을 얻기 위해 양평에 있는 친구들을 자주 만나러 다녔다. 내게도 같이 가자고 했지만 나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돌아다닐 돈이 없다는 생각도 했고 그 친구들이 그 사람의 친구이지 내 친구가 아니라는 생각에 약간의 거리감도 느꼈다.

결정적으로 내가 이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그가 내가 아플 때마다 보여줬던 태도였다. 나는 적어도 사랑하는 사이라면 적어도 아플 때만은 곁에 있어주고 더 챙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주는 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겪어봤고, 그래서 난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아플 때 늘 곁에 있어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내가 아플 때마다 하필이면 곁에 없었고, 그건 운이 없는 측면도 있었지만 의지의 측면도 분명 있었다. 나는 심지어 아플 때마저도 그의 우선순위에서 밀려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곁에 없을 뿐 아니라 전화나 메시지로라도 자주 안부를 묻지도 않았다. 내가 아프더라도 자신이 갖고 있는 불평불만을 아픈 내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혼에 대해 떨어져 지내면서 고민해보는 기간동안에도 한번 몸살기운이 찾아왔었는데, 그때도 역시 적당히 무심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그간 아플 때마다 겪어왔던 외로움이 떠올랐으며 앞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이 결혼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또한 그 사람은 홍천에서 우리와 함께 농사 짓던 다른 남자에게 고백을 받았었고, 처음엔 거절했지만 계속 그 남자와 친하게 지냈다. 둘은 친구였고, 나도 그 남자와 친구였지만, 그 관계는 결국 우리에게, 특히 나에게 상처를 남겼다. 거기엔 내 실수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것도 내겐 참 어려운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정말로 이혼을 할 것인가 고민할 때, 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이니 완벽할 순 없지만 사랑이란 바라지 않고, 돌아올 것을 기대하지 않고도 주는 것이라고들 하지 않냐고. 듣고보니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현실에서 우리가 예수나 부처가 아니기 때문에 정말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주기만 한다는 건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사랑에 빠져있을 때는 부분적으로나마 그런 상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바라는 것만 엄청 많았다. 내가 주고싶은 것보다 받고 싶은 게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때 난 그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인정하게 됐다. 솔직히 아직도 사랑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한때 사랑했고 부부였던 우리는 지금도 철천지 원수가 된 것도 아니고, 이혼을 하고나서도 얼굴을 보거나 연락을 하는 게 엄청나게 껄끄럽진 않을 듯하지만, 그래도 결국 더 이상 부부로 같이 살 수는 없다고 적어도 나는 결론내렸다. 어쩌면 나만 괜찮았으면 이 결혼관계는 더 유지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건 내 문제다. 그렇지만 내가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더 행복해지고 싶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도저히 이 결혼을 유지할 수 없다. 이혼하기로 결정하고나서 많이 미안하고 아프고 쓸쓸했지만, 또 이 결혼에 엮여있는 가족들과 여러 사람들에게도 미안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고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난감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벌써 많이 나아졌다고 느끼고 있다. 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어떤 면으로 봐도 여전히 힘든 시기인 지금이 난 그래도 훨씬 낫다. 그 사람도 내가 스스로 더 행복한 삶을 찾길 바라고, 그걸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기뻐하고 축하해줬다. 나 역시도 그가 나와 함께 있을 때보다 더 행복해했던 많은 친구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기를, 이전보다 더 행복한 삶을 찾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응원하고 있다. 솔직히 우리가 같이 사는 건 잘 맞지 않았지만 그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렇게 인사했다.

"안녕, 그동안 사랑해줘서 정말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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