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실패가 아니다

참참. 2020. 3. 27. 06:48

 

나 역시도 나도 모르게 "결혼에 실패했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실패랄 게 뭐 있나 싶다. 삶에 실패는 없다. 경험만 있을 뿐이다. 결혼했다가 이혼한 것이 실패라면, 대학교에 갔다가 그만둔 것도 실패고, 직장에 다니다가 그만둔 것도 실패고, 시골에 갔다가 서울로 돌아온 것도 실패인가? 점심으로 파스타를 먹으려다 1분 뒤 마음이 바뀌어서 김치찌개를 먹은 것도 실패인가? 그런 것이 실패라면 실패는 매우 일상적이고 얼마든지 해도 괜찮은 것이고, 사실 그런 것들을 '실패'라는 말로 깎아내릴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 입사 한 달도 안 된 상태에서 하루 휴가를 쓰고 이혼서류를 마저 정리하러 다녀왔다. 법원에는 다들 코로나로 연기되어서 그런지 원래 이혼하는 사람이 많은 건지 줄이 길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나이가 많아보이는 분들부터, 중년과 젊은 부부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이렇게 오랜 기다림과 복잡한(?) 절차 끝에(사실 우리는 아이를 낳지 않았고 서로 간의 합의로 헤어지는 협의 이혼 절차였기 때문에 절차적으로는 이혼 중에서 제일 간단한 절차였다) 마주한 판사님은 신분증 사진 한번 보고 이름 한번 부르고 얼굴 한번 쳐다본 다음 "두 분이 이혼하기로 서로 합의해서 결정하신 것이 맞습니까?" 정도의 질문을 던지고 둘이서 "네"라고 하니까 나가시면 된다고 했다. 이걸 위해서 우리는 근 두 달을(자녀가 없는 협의이혼의 경우 숙려기간을 한 달 조금 넘게 주는데 코로나 때문에 기일이 3주나 더 밀렸다) 기다린 것인가.

그렇게 해서 서류를 받았는데, 그게 끝이 아니라서 법원에서 받은 확인서를 다시 구청에 가서 그 서류를 제출하면서 이혼신고서를 작성해서 그것도 제출해야 행정적으로 이혼이 마무리되는 것이었다.(이것도 또 처리되는데는 일주일 정도가 걸린단다. 뿐만 아니라 이 구청에 신청 혹은 신고하는 일을 법원처리 이후 3개월 내에 하지 않으면 이혼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밟아야 한단다.) 우리는 가장 가까이 있는 구청에 가서 신청했다.(법원은 꼭 둘 중 한사람의 현재 거주지 관할 법원으로 가야하지만 구청은 아무데나 가서 신청해도 상관없다.)

어쨌거나 이 서류작업들을 하러 같이 다니고 밥도 한 끼 같이 먹으면서 서로 요즘 살고 있는 일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여전히 (전)처제는 못 말리는 사고를 치고 있었는데 사고의 스케일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지만, 대체로는 둘 다 꽤나 괜찮은 일상을 찾아냈고 만들어냈다는 게 우리 둘 다 동의한 지점이었다. 그는 멀리서 힘들게 만나러 다니던 제일 좋아하는 친구들 그룹과 같은 동네에서 살면서 자주 보게 됐고, 심지어 그들 중 한 커플이 최근 운영하기 시작한 가게 바로 옆에 집을 얻게 되어서 좋아하는 그 친구들과 점심도 같이 먹는다고 했다. 새로 구한 집은 볕도 잘 들고, 이전 집보다는 멀지만 스쿠터 타면 금방 가는 거리에 친구들과 함께 농사 지을 밭도 구해서 같이 농사도 시작했다고.

나 역시 운 좋게도 직장을 구했고, 새로운 분야로 진출했기에 여전히 공부할 것은 산더미고 직장은 들어가자마자 매우 바쁜 시기를 맞이하긴 했지만 꽤 만족하고 있다. 자전거로 출근하면서 오히려 시골에 있을 때보다 몸도 더 많이 움직이고 건강해지는 기분인 데다, 앞으로 소득도 안정되고 더 나아질 것이고 새로운 것도 계속해서 더 배우고 내 능력이 나아지고 있다는 기분도 좋다. 전보다 의욕적이 됐고, 많아졌던 잠도 원래의 수준으로 돌아왔다. 직장생활, 일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오히려 즐거운 편이다. 시간외수당도 주지 않을 것 같은 약간의 야근이 있긴 하지만 그래봐야 한 시간 정도 수준이라 견딜만 하다. 약간 늦은 저녁밥이긴 해도 저녁은 보통 집에 와서 먹을 수 있다.

우리는 각자 더 나아지고 있다. 새로운 일상 속에서 각자가 원하는 것들을,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그거면 됐다. 충분하다. SNS에 올라오는 사진을 가끔 보고, 아주 가끔씩 소식을 주고받겠지. 우여곡절이 없었다고 할 순 없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면 왠지 이렇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는 기분마저 든다. 물은 결국 바다로 흘러가듯이. 삶이라는 이 여행은 결국 흘러야하는 곳으로 흘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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