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키보드를 사다

참참. 2020. 3. 29. 10:23

 

금요일날 9시 넘어서 퇴근을 했다. 목요일날 개인 사정 때문에 하루 쉬었는데, 가자마자 자리는 옮겨져있지(자리 배치가 바뀔 거라는 건 수요일에 듣긴 했지만), 컴퓨터 선은 하나도 안 꽂혀있지(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꽂는 걸 깜빡했다고 옆자리에 있는 상사분이 미안하다고 말씀은 해주셨다.), 그 와중에 아직 컴퓨터도 못 켰는데 당일까지, 혹은 다음 월요일까지 해야한다는 일들이 엄청나게 요청이 들어왔다.

애초에 받을 때부터 도저히 다 할 수가 없어서, 어떤 것은 결국 외주업체에 작업을 맡기기도 했다. 그랬는데도 결국 다른 직원이 일일이 하나씩 손으로 노가다해서 고쳐야하는 걸 그나마 좀 편하게 해줄 수 있게 도와주다가 9시 넘어서 퇴근했다. 이 회사에 다니는 최고의 장점이 그나마 빠른 퇴근이었는데, 난 진짜 야근이랑은 안 맞나보다. 집에 오니까 10시 반쯤 됐는데, 일상이 다 망가진 기분이었다. 너무 지치기도 하고, 기분이 안 좋았다.

그 상태로 게임을 하다 계속 지고, 새벽 늦게까지 멍하게 아는 사람 둘이랑 같이 게임하다가 잤다. 일상 루틴이 결국 다 깨졌다. 게다가 월요일까지 해야할 일이 아직도 산더미처럼 남아있고, 월요일엔 또 월요일의 일이 들어오겠지하는 생각이 드니까 진짜 너무 스트레스여서 이 회사 계속 다닐 수 있나 싶다. 이 일만 끝나면 적어도 이 정도까지 바쁜 일은 자주 없겠지라고 생각하고 이제 내 일이 아닌 것, 나 말고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 다른 부서에서 해야할 일들은 철저하게 거절하거나 잘 정리해서 다른 부서로 넘겨버려야겠다는 생각을 진짜 많이 했다. 바빠죽겠는데 듀얼모니터 선 연결하는 것까지 내가 다른 층까지 가서 해줘야하나? 그게 뭐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케이블만 꽂으면 되는 것을.

 

여하튼, 그러다가 전부터 벼르고 있던 사무실에서 쓸 키보드 구입을 어제 단행했다. 본래는 지금 집에서 쓰고 있는 체리 Cherry MX Board 3.0S 적축 제품이 굉장히 만족스러워서 같은 제품의 갈축을 경험해볼 겸 주문하려고 했는데, 불과 지난 달까지만 해도 구입했다는 후기가 있는데 지금 시점에서는 이 제품이 판매가 중단됐다. 중고나라에서 검색해도 올라오면 한시간 안에 다 팔릴 정도로 구하기가 어렵다는 걸 확인하고 다른 제품으로 눈을 돌렸다. 근데 이 제품보다 더 사용감이 별로인 제품을 사면 진짜 불만족스러울 것 같아서 좋은 걸 찾다보니 8~9만원 선으로 잡았던 예산이 순식간에 10만원 이상으로 올라가버렸다.

아직 첫 월급도 안 받았는데 그래도 곧 월급 들어온다는 생각과 집보다 회사에서 더 오래 키보드를 쓴다는 점, 정말 하루 중에 아주 긴 시간을 그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보낸다는 점, 회사를 옮기더라도 가지고 다니면서 10년 정도는 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오래 쓸 거라는 각오 등으로 자기합리화를 마치고 이전엔 생각해본 적도 없던 10만원 초중반대의 키보드들을 봤다. 그러다보니까 결국 명성이 자자해서 이름 많이 들어봤던 레오폴드 쪽으로 기울었다. 미친 A/S로 유명한 덱이나 파스텔블루의 색감이 정말 맘에 드는 듀가드X씽크웨이 토체티 제품, 또는 무접점 키보드를 한번 경험해볼까 등 여러 고민이 됐는데, 결국 기계식키보드를 쓴다면 레오폴드 갈축 정도는 써봐야겠다 싶어서, 게다가 라이트 핑크 색이 나름 꽤 맘에 들어서 그쪽으로 구입했다.

레오폴드 FC900R OE light pink

 

듀가드 X 씽크웨이 (DURGOD X THINKWAY) 토체프 (토체티라고 해서 텐키리스 제품이 더 유명한데 난 사무용으로 쓸 거라)

 

사실 영상과 후기만으로는 타건감과 실제 색감을 아무래도 알기가 어렵다보니까 용산에 가서 직접 타건을 해보고 실물도 보고 구입해야겠다는 생각을 주문하고나서야 했는데, 검색해보니까 코로나 때문에 당분간 타건을 해볼 수 없다고 해서 그냥 인터넷 구매를 하기로 했다. 중고나라에서 중고로 구입할까도 고민했는데, 14만원짜리 제품인데 중고에서도 중대한 하자가 없는 한 1~2만원 차이밖에 나지 않아서(10만원에 올라온 것도 있는데 색상이나 축의 종류 등이 다 정확히 맞기는 어려우니) 그냥 새거 사서 오래 쓰자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키보드 리뷰 영상만 몇 시간을 봤는지 모르겠네. 회사에 키보드가 빨리 왔으면 좋겠고, 아주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아주 간절히. 그 핑크색 키보드를 보고 그걸로 타이핑을 하는 것만으로도 회사에서의 시간이 조금은 더 나아지길 바란다. 내 일상은 소중하니까. 솔직히 기능이나 여러가지 다른 장점보다는 예쁜 것과 두드리는 느낌과 두드릴 때 나는 소리가 맘에 드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동안 많은 돈을 벌어본 적도 없고, 쇼핑이나 사치를 좋아하진 않는데, 그래서 내가 살아생전 10만원도 넘는 키보드를 사서 쓸 날이 올 거라고는 한번도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살다보니 많은 게 다르게 느껴진다. 10만원도 넘는 가격이 키보드치곤 물론 비싼 가격인 건 맞지만 핸드폰이라든가 다른 고작 2년, 3년 쓰는 전자제품들에 비해서 못 살 정도로 비싼 것도 아니고 내가 빚을 내서 사는 것도 아니니까, 뭐. 다른 돈 많이 드는 취미생활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살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자꾸 보다보니까 너무 많은 정보를 알게 되고 눈이 점점 더 높아지는 건 사실이다. 어떤 분야든 어떤 소비든 마찬가지이듯이 아는 만큼 보이고 좋은 걸 경험하고나면 이전엔 별 신경도 쓰이지 않고 잘만 사용하던 안 좋은 것들의 단점이 크게 느껴진다. 이거 하나 사서 오래 쓰는 거는 전혀 문제가 아닌데, 나도 자꾸만 눈이 높아져서 이것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여러 대의 키보드를 놓고 돌려가면서 쓰고 싶은 욕구가 생길까봐 그게 좀 걱정이다. 10만원대 키보드를 하나 사는 건 괜찮은데 여러 대를 사기(어차피 한 컴퓨터에 하나밖에 못 연결하는데) 시작할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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