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392

힘든 일 있으면 얘기해

우리는 종종 "힘든 일 있으면 얘기해"라고 말한다. 그건 참 좋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니가 힘들 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말이니까. 마음을 쓰는 말이다. 나도 종종 한다. 그런데 오늘 문득 그 말을 뒤집어 생각해보니 힘든 일이 있을 때만 얘기할 수 있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다가 힘들고 어려운 일에 맞닥뜨렸을 때 가장 먼저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매일같이 이야기 나누는 사람이 아닐까싶다. 그 사람이 나를 듣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대개는 가장 사소한 이야기를 매일같이 나누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이야기도 나누게 되지 않나 싶다. 물론 사소한 이야기라도 마음을 담은 이야기여야 한다. 사소한 이야기를 매일같이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이라면 힘든 일 있으면 얘기하라고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

일상/2020~2022 2021.11.30

일주일에 7일

만나는 모든 날을 단순히 "몇월 몇일 어디에서 만났다" 정도만이라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처음엔 우리가 하도 걸어서 같이 몇 킬로미터나 걷는지 한번 세어보자고해서 시작된 기록이다. 요즘은 거리는 기록하지 않고 있지만 언제언제 만났는지 기억하고 싶어서 노션에다 만나는 날들을 간단하게나마 계속 적어두고 있다. 지난주에는 단 하루도 얼굴을 보지 않은 날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매일 적어도 한 시간 이상 얼굴을 마주했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말이 너무 많다는 것을 자책하며 살았다. 그렇지만 돌아서 후회하는 순간들이 쌓이고 의식적으로 조심한다해도 늘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말이 많은 것을 후회하는 것도 지겨워서 나중엔 수다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긍정하려 애쓰며 너스레를 떨고 다녔다. 말이 없어진 것은..

일상/2020~2022 2021.11.30

무엇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지에 대한 보고서

와우, 여러모로 몹시 흥미로운 보고서다. 공유해주신 분들께서 좋은 인사이트를 주신 덕분에 나도 표에 보이는 순서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에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다. 한국인들이 내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으로 돈(물질적 부)을 택한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것도 충격적이지만, 의외로 조사결과를 들어가서보면 다른 나라들의 사람들이 물질적 부에 대해 언급(mentioned)한 비율이 결코 한국보다 적지 않다. 다만 그걸 언급하면서 다른 것들도 여러 개 복수선택했기 때문에 그게 1위로 쉽게 부각되지 않고 복수선택한 다른 선택지들이 더 높은 순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 조사에서 정말 특이한 점은 한국(그리고 일본 정도)은 여러 개를 고를 수 있는데도, 단 하나의 삶의 가치만 응답한 비율이 굉장히 높다는 것(한..

일상/2020~2022 2021.11.30

2호선을 타고

2호선을 타고 한강을 건너는데 7시인 지금 벌써 날이 어두워 까만 한강물에 불빛이 일렁이는 것이 너무 예뻐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름다운 장면을 보면 이제는 나도 모르게 그가 떠오른다. 정혜신 선생님의 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4-5개월 전에 처음 읽으면서 너무 펑펑 울어서 과연 다시 읽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던 책이다. 여전히 울컥했지만, 몇달전의 내가 그어둔 밑줄들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달라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사랑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5일간 불편을 감수하며 연습 중이던 딩굴키보드에서 다시 쿼티자판으로 돌아왔다. 단순히 불편하고 좀 느린 걸 넘어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만큼 표현할 수 없다는 제한됨의 감각이 생각보다 컸다. 내 핸드폰 쿼티자판의 속도가 생각보다 ..

일상/2020~2022 2021.11.21

냉장고를 보다가

아침에 냉장고를 보다가 터무니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터무니없는' 이라는 말이 떠오른 건 최근 강아솔 노래모음을 유튜브로 듣는데 영상제목에 "터무니없이 아름다웠던"이라는 말이 있어서일 것이다.) 근데 다시 생각해보니 사랑이란 게 원래 어느 정도는 터무니없는 거 아닌가 싶다. 아침에 수능에 대한 얘길 잠깐 나눴다. 수능에 인생이 걸려있다고 믿는 어른들은 대체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수능에 다 걸기에는 인생은 훨씬 더 다양한 맛 아닐까. 이 글을 딩굴키보드로 썼다(가 인스타그램 앱 오류로 날려먹어서 컴퓨터로 다시 썼지만). 핸드폰으로 쿼티자판을 쓰는 것이 키가 작아서 잘못 눌리는 일이 많아 불편했지만 대안을 몰랐다. 우연히 누군가 딩굴과 모아키를 알려주어서 시도..

일상/2020~2022 2021.11.21

오랜만에 보는 친구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아마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친구를 만났다. 얼굴이나 헤어스타일이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몸이나 걸음걸이는 그때보다 탄탄하고 건강해보였다. 10년이 넘는 긴 세월이 지나서 보는 것치고는 어색함이 크지 않았다. 목소리나 말투는 내 기억보다 조금 더 차분해진 느낌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사람과는 못 본 세월만큼 쌓인 할 얘기가 끝도없이 많이 나오기도 하지만, 보통은 오히려 할말을 찾기가 어렵다. 매일 만나는 사람, 자주 이야기 나누는 사람과 오히려 할말이 많다. 재밌는 일이다. 그만큼 대화를 잘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라는 건 생각보다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가면갈수록 더 깨닫는다. 지난 10여 년의 세월동안 어떤 생각으로,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일을..

일상/2020~2022 2021.11.18

신입 개발자

지난주에 회사에 신입 개발자분이 한 분 들어왔다. 나이는 몇 살인지 물어보지 않았지만, 어쩐지 비슷한 또래일 것 같다. 항공, 여행쪽에서 꽤 오래 일하셨는데 정확히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잘 이해를 못했지만, 작년 코로나 이후로 회사가 힘들어져서 마지막에는 영업부서까지 갔다가 결국 그만두셨다고 했다. 그 뒤에 학원에서 6개월 코딩을 배워 우리 회사에 개발자로서는 첫 직장으로 입사했다. 개발자로서는 첫 직장이지만 여행관련업계 경력이 있으므로 이 사업 영역에 대한 이해가 높고 기본적으로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서 뽑으신 것 같다. 그건 분명 높이 평가할만한 데가 있는 경험이다.(요즘 경력 개발자뽑기가 워낙 힘든 탓도 있지만, 우리 팀장님은 기술적인 건 들어와서 가르치면..

일상/2020~2022 2021.11.16

나보다 더 강한 마음으로

새벽 5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가를 하고, 최근 듣고 있는 파이썬 데이터분석 기초 강의를 들었다. 지난 강의를 다시 들으며 내용을 기술블로그에 정리하면서 복습을 했다. 그러다보니 6시쯤에 이미 몹시 배가 고파졌다. 남아있던 밥과 국을 데우면서 초코 그 자체인 휘낭시에를 하나 집어먹었다. 밥을 차려 먹으며 강아솔 노래를 틀어두었다. 매일의고백이 흘러나왔다. 분명 이미 백번도 더 들은 노래일텐데 세상에 홀로 깨있는 것같은 조용한 새벽의 분위기를 타고 새삼스럽게 어떤 가사가 마음의 문을 두드려왔다. "나보다 강한 마음으로 날 지켜봐 줬던 너를 생각하며"라는 가사였다. 우리 모두는 삶의 어느 장소에서, 그런 순간을 만나게 된다. 나보다 더 강한 마음으로 나를 지켜봐줄 사람이 필요한 순간. 나보다 더 나를 믿..

일상/2020~2022 2021.11.16

새우 대모험 (feat. 우체국 택배 주소 잘못 입력했을 때, 이미 발송된 우체국 택배 수령주소 변경 주소지 변경) - 배드엔딩

## 아래에 내용 정리 있음 ## 새우구이를 먹고 싶다는 전직장동료들의 집들이를 위해 네이버쇼핑에서 새우를 주문했다. 저렴한 곳을 비교하고 어쩌고해서 열심히 흰다리새우 1kg을 두 박스를 주문했다. 토요일에 집들이를 하는데, 주문 다음날 도착한다고 하긴 하지만, 새벽배송은 아니라서 몇시에 도착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집들이가 점심이기에 혹시라도 점심때 도착을 안할까봐 냉동새우 1kg 한 박스는 목요일 출발해서 금요일에 미리 도착하게, 생새우 1kg 한 박스는 금요일에 출발해서 토요일 당일 도착하게 주문했다. 금요일 점심 즈음, 전화를 받았다. 택배가 도착했다고. 근데 뭐지? 어째서 내 새우가 성북동으로 간 것이지?! 이제 보니 예전 살던 성북동 주소로 새우를 주문한 것이다. 네이버쇼핑 기본주소지를 옮..

일상/2020~2022 2021.11.12

질투

지금까지 그래도 몇번의 연애를 해왔는데, 질투라는 감정을 제대로 보여준 사람이 없었다. 나 역시 질투를 그리 많이 느껴보지 못했다. 그래서 질투라는 감정이 낯설고 불편하다. 이전에는 나나 상대방이 질투를 별로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성숙하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질투라는 감정은 상대가 날 떠날까봐 불안하거나, 그만큼 서로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것에서 기인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얼마 전 재인이 그저 반찬가게에 온 남자 손님과 대화나누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질투가 올라오는 걸 기억해보면 꼭 그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보다 신뢰하는 사람이고 그 어느 때보다 안정감을 주는 관계 속에 있는데 여태껏 제대로 경험해본 적도 없는 질투도 같이 경험하고 있다. 타인들이 맺는 관계나 여러 매체에서 묘사되는..

일상/2020~2022 2021.11.11

잘 살고 있다는 감각

잘 산다는 게 무엇일까? 내가 이용하는 가계부 서비스의 커뮤니티 익명게시판에 누군가가 당신에게 잘 사는 삶이란 어떤 삶이냐, 잘 산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걸 보고 나는 "내 가치와 소중함을 알아주고 믿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 것"이라고 댓글을 달았다. 나라는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는 그게 꽤 중요한 일인가보다. 내가 잘 살고 있다고 느낄 때는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기쁠 때이다. 의식적으로 잘 살고 있다는 생각같은 건 없었고 그때도 분명 그 나름의 고민과 힘듦은 있었지만,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아침에 눈이 번쩍 떠졌고, 그게 좋았다. 밤이 되면 자연스럽게 스르륵 잠에 들었고, 아침이면 하루가 시작되는 느낌을 좋아했다는 기억이 남아있다. 삶에서, 일상에서, 미래에 기대하는 일들이..

일상/2020~2022 2021.11.10

설거지

어제 재인이 아침에 밥을 준비해주어서 출근 전에 잠을 좀 더 잘 수 있었다. 재인은 출근하지 않는 날이라 집에 가서 낮잠을 자겠다고 했다. 그 사랑이 참 고마웠다. 함께 밥을 먹는 시간이 참 행복하고 따뜻했다. 근데 밥을 먹고나서 설거지도 재인이 해주겠다고 했다. 자신은 집으로 가니까, 금방 씻을 수 있고 나는 출근하니까 씻는 동안 설거지를 해두겠다고. 그렇게 해서 설거지도 재인이 해주었다. 어제 저녁때 만나서 시타의숲 빵정식을 맛있게 먹고 걸으며 이야기 나누었는데, 어쩐지 방어하는 마음이 되어버렸다. 왜 그랬을까 생각하다가 설거지에 닿았다. 너무 편하고 행복했는데, 동시에 아내의 가사노동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매일같이 받던 여전히 흔한 가부장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자기 밥과..

일상/2020~2022 2021.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