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설거지

참참. 2021. 11. 6. 08:40

 

 

어제 재인이 아침에 밥을 준비해주어서 출근 전에 잠을 좀 더 잘 수 있었다. 재인은 출근하지 않는 날이라 집에 가서 낮잠을 자겠다고 했다. 그 사랑이 참 고마웠다. 함께 밥을 먹는 시간이 참 행복하고 따뜻했다.

근데 밥을 먹고나서 설거지도 재인이 해주겠다고 했다. 자신은 집으로 가니까, 금방 씻을 수 있고 나는 출근하니까 씻는 동안 설거지를 해두겠다고. 그렇게 해서 설거지도 재인이 해주었다.

어제 저녁때 만나서 시타의숲 빵정식을 맛있게 먹고 걸으며 이야기 나누었는데, 어쩐지 방어하는 마음이 되어버렸다. 왜 그랬을까 생각하다가 설거지에 닿았다. 너무 편하고 행복했는데, 동시에 아내의 가사노동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매일같이 받던 여전히 흔한 가부장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자기 밥과 자기 설거지도 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지 않나하고 생각했던 기억들도.

밥을 누군가 해주었으면 설거지 정도는 해야한다는 마음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성북동에 살 때도 하메 M이 밥을 해주고 설거지까지 해줄 때는 편하고 고맙지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늘 그런 건 아니었지만, 행동이 빨라서 내가 이제 막 일어날 때 이미 설거지를 시작하고 있기도 했다. 설거지 정도는 내가 하겠다고 하면 그러면 니가 먼저 와서 설거지를 시작해야한다고 해서, "그럼 내가 설거지를 하기 위해 눈치보면서 밥을 더 급하게 먹기라도 해야한다는 말이냐, 밥 좀 편하게 먹자"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재인은 그런 건 아니었고, 미리 이야기하는 과정을 거쳤다. 근데 당시에는 알아채지 못했다. 설거지까지 맡겼을 때 내가 어떤 마음을 느낄지를. 출근을 하면서 은근히, 그래도 설거지 정도는 내가 했어야했다라는 마음이 있었다. 정리되지 않고 함께 출근하는 길이 행복한 와중이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런데 사랑이 많아서 사랑을 주는 것이 잘못이냐, 그 사랑을 받고 당연하게 여겨버리고 나쁘게 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거까지 사랑을 준 사람의 잘못이냐, 그거까지 계산해서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게 적당히 해줘야하는 책임까지 주는 사람이 져야하느냐는 말에 내가 찔리는 구석이 생기고 말았다. 

이것을 알아차려야할 책임은 나에게 있음을 알았다. 설거지까지 해주는 것은 불편하다면 그걸 조율해가야하는 책임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설거지까지 해준 상대방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 어디선가 읽었던, 배우자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침대를 깔끔하게 정리해놓는 것에서 불편함을 느꼈다는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근데 그걸 불편하게 여길 거라고 상대방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굳이 따지자면 사랑으로 침대를 정리해놓은 사람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 불편함을 알아차리고 이야기하지 않은 사람의 잘못이 더 크지 않을까, 말을 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으니까. 그러나 그 부부는 결국 그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했고, 침대를 정리하던 쪽은 깜짝 놀랐지만 서로 이야기 끝에 침대를 정리하는 일을 멈추기로 조율을 할 수 있었고, 그 일을 계기로 더 많은 사소한 것들에 대해 싸워갈 수 있는 관계로 발전했다고 한다. 사랑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주고 싶은 사랑과 받고 싶은 사랑이 다른 일은 또 얼마나 흔한가. 그걸 서로 부끄러워하지도 지치지도 않고 이야기해나갈 수 있는 관계는 얼마나 귀한가.

관계를 맺고 있으니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게 어떤 영향인지를 알아차리는 일은 둘 다 소홀해서는 안되는 일, 특히 자신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와 받고 있는지를 스스로 계속 자각하면서, 또 이야기하면서 조율해나가야하는 일이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는 식으로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최악이다.

가끔은 한쪽이 다 하는 일도 생길 수 있지만, 평소에 같이 밥을 먹을 때는 설거지라도 해야, 내가 이 과정에서 단지 받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밥을 해먹었구나라고 내가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걸 이제 확실히 알겠다.

우리는 한 팀이라는 말, 들을 때마다 너무 좋다. 그 감각을 잊지 않고 싶은 마음이 된다. 그런데 살다보면 자꾸 깜빡하게 된다. 그렇다면 한 팀이라는 건 어떤 걸까, 무엇일까 또 생각이 그리로 연결되어 나간다. 이런 대화들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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