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잘 살고 있다는 감각

참참. 2021. 11. 10. 07:38

 

잘 산다는 게 무엇일까? 내가 이용하는 가계부 서비스의 커뮤니티 익명게시판에 누군가가 당신에게 잘 사는 삶이란 어떤 삶이냐, 잘 산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걸 보고 나는 "내 가치와 소중함을 알아주고 믿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 것"이라고 댓글을 달았다. 나라는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는 그게 꽤 중요한 일인가보다.

내가 잘 살고 있다고 느낄 때는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기쁠 때이다. 의식적으로 잘 살고 있다는 생각같은 건 없었고 그때도 분명 그 나름의 고민과 힘듦은 있었지만,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아침에 눈이 번쩍 떠졌고, 그게 좋았다. 밤이 되면 자연스럽게 스르륵 잠에 들었고, 아침이면 하루가 시작되는 느낌을 좋아했다는 기억이 남아있다. 삶에서, 일상에서, 미래에 기대하는 일들이 잔뜩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가 그리 먼 일이 아니라 일부가 자주 충족되었고, 또 당장 충족되지 않는 좀 더 먼 기대들에 대해서는 좀 막연하긴 해도 어련히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잘 살고 있다는 느낌을 잃었을 때 가장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내가 더이상 삶에 기대하는 게 없다고 느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삶은 계속되었고, 또 그 삶도 항상 나쁘지만은 않았기에 내가 삶에 더이상 기대하는 게 없는 것은, 기대하는 것들이 이미 어느 정도 충족되어있기 때문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닌 것 같다. 그렇게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 애썼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길을 잃었다는 생각(그래서 길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시구를 좋아한다)과, 어디에 있어도 여기가 아닌데하고 여겨진다는 점에서 세상에 내가 있을 곳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블로그에 20년 1월에 '내게도 제자리가 있을까'라는 글을 썼는데, 지난달에는 '세상에 내가 있을 곳이 있다'는 글을 썼다는 걸 알게 됐다.)(김소연 시인은 <마음사전>에 "우울 : 어떤 것을 맛보아도 이게 아니었다 여겨진다는 점에서, 마음이 식욕을 잃어버린 상태"라고 썼다.)

지금은 잘 살고 있다는 기분이 자주 든다. 특히 아침에 일어나면서 뭔가 생각할 때마다 감사한 일들이 많이 떠오르고, 내가 해야할 일들, 나를 기쁘게 하는 일들, 기대되는 일들, 하고싶은 일들을 떠올릴 수 있다. 나를 보고싶어하는 사람이 있고, 나도 그 사람이 보고싶고, 며칠 내로 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끼니를 챙겨먹는지 어떤 기분인지 궁금해하는 사람, 어떤 시시콜콜한 기분이라도, 지나가다가 본 아름다운 풍경들도 뜬금없다거나 적절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고 얼마든지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궁금하거나 마음에 어려움이 생기면 물어볼 수도 있는 상담을 정기적으로 받고 있고, 안정적으로 들어오는 월급이 있고, 소소한 즐거운 일들이 있고, 맛있는 것들을 자주 먹고, 출퇴근 이동시간이 넉넉하게 잡아도 편도 50분을 넘지 않는다. 따뜻한 말과 스킨십을 자주 주고받는다. 충만함, 행복감, 기쁨과 즐거움을 자주 경험한다. 자주 웃는다. 별 거 아닌 대화를 하다가도, 매일 걷는 길의 풍경을 보면서도 웃음이 난다. 

사랑에 빠진 연애 초기 상태니까 그렇다는 핀잔(대체 누가?), 이러다 상황이 달라지면 민망(누구에게?)할 것 같아서 또는 너무 자랑하는 것같은(자랑 좀 하면 어때) 글이 될까 걱정하는 마음에 쓰지 못했던 말들이었으나, 좋은 것일수록 더 기록해두고 싶다. 행복했던 기억은 힘들고 어렵고 불행하고 스트레스받았던 기억에 비해 지속력이 약하므로(약 5배 이상), 내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을 통해 어떤 좋은 기분들을 느꼈는지를 잘 기록해두고 싶다.

연애 초기의 행복함을 여기저기 자랑하던 시절의 감각과는 꽤 다르다. 지금은 오히려 그것들을 온전히 전달할 방법이 없으므로 지금 관계의 좋음에 대해서 이전처럼 미주알고주알 떠들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섣불리 말하지 못하고 말을 아끼게 된다. 굳이 물어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갈 만한 여행이나 선물같은 것들을 한두 가지 얘기할 뿐이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아예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에 비하면 자랑같은 것에 크게 관심이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자랑하지 않아도 내가 잘 살고 있고 행복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고 있으니까. 누가 인정하거나 하지 않거나하는 일(누가 진짜로 그럴 수도 없고)로 내가 느끼는 내 경험에 크게 영향 받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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