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291

그럴 리가 있나

어제 상담 속의 한 장면 내가 습관적으로 또 이런 종류의 말을 내뱉었다. "어휴~ 그땐 정말 제가 대책이 없었죠." 흔히 이런 말은 농담으로, 웃으며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정색하며 즉각 반박했다. 그렇지 않다고. 대책이 없었던 게 아니지 않냐고. 다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했던 거 아니냐고. 그건 용기있는 선택이었고 대단한 일이라고. 내가 인식하고 바라보는 나 자신의 과거와 경험들에 대한 체감온도가 몇도쯤 쑥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어쩐지 내가 살아온 그동안의 삶이 조금 더 따뜻했다고 느껴지는 것 같은 느낌. 다시 생각해봐도 내가 되도록 남의 인생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고 아주 조심하듯이, 내 인생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아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누군가가 던지는 위로와 ..

일상/2020~2022 2021.10.03

속초여행

9월말, 속초 흐리고 비가 와도 아름다웠고 해가 뜨자 찬란했다. 함께한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는 느낌이 이렇게 기분좋은 것인지 몰랐다. 체하는 바람에 컨디션이 안좋고 머리가 아파서 어떤 글도 쓰기 어려웠는데, 이제 회복이 됐다. 오히려 그렇게 평소보다 더 약해진 상태에 있어보니까 내 의지가 전보다 더 단단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도 내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구나, 먼저 헤아릴 여유는 없지만 귀 기울일 수 있고 얼마간의 단호함을 유지할 수 있구나. 싸움을 하면 후회와 자책과 앙금이 남곤 했다. 좋은 싸움이라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관계에 갈등이 없을 수 없는데 잘 싸우는 방법을 모르니 이겨도 미안함과 후회와 자책이 남고 져도 앙금과 나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는 슬픔이 남았다. 그렇게 상..

일상/2020~2022 2021.10.03

밤, 그리고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를 마저 읽으며 밤을 삶았다. 개구리님과 소금쟁이님께서 산밤을 잔뜩 보내주셨다. 몹시 감사하지만 게으른 사람에겐 약간 난감할 정도의 양! 삶아서 먹어보니 맛있었다. 내일 오전에 뵙는 심리상담 선생님께 뜬금없이 밤을 좋아하시는지 메시지를 보냈다. 서울에서 하루종일 컴퓨터 들여다보고 사느라 계절을 잘 못 느끼는데 봄이면 두릅을 보내주시고 가을이면 밤을 보내주시니 받을 때마다 늘 감동이다. 나는 뭐 드릴 것도 없고 뵈러 가지도 못하는데 큰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도 두릅은 미친듯이 먹고 밤은 좀 느릿느릿 먹는다. 하하하. 재인이 운영하는 팝업식당의 이름이 "채소의 계절"이다. 계절이라는 말이 들으면 들을수록 좋은 느낌이다. 지나야만 하는 그 모든 계절들을 온전히 지나와야만 채소든 과일이든 제 맛을 낼 수..

일상/2020~2022 2021.09.24

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

진정으로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대하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면 스스로 소중히 여기는 감각을 찾는 것조차 쉽지 않다. 단 한 사람이라도 내가 진짜로 소중한 사람이고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단단하게 믿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삶이, 어떤 시절들이, 고난과 역경과 아픔과 슬픔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결국 즐거운 이야기로 기억될 수 있는 거 아닐까.

일상/2020~2022 2021.09.24

모든 사랑은 특별했다

모든 사랑은 특별했다. 의식적으로도 모든 사랑, 모든 관계를 더 특별하게 여기려고,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땅히 그래야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랑을 특별하게 여겼던 내가 좋다. 그럼에도, 굳이 그러했던 당시의 감정들을 재인에게 보여줄 필요는 없었는데, 하는 후회가 잠깐 들었다. 그리고 올라오는 이 불안감은 트라우마적인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실수하고 싶지 않다, 단 한번의 실수로 관계가 틀어지게 만들고 싶지 않다, 라는 두려움이다. 자신에게 불편한 이야기를 꺼냈다는 이유로 기약도 없이 연락을 끊어버렸던, 그래서 내가 계속 "이렇게 끝인가?"하고 절망하길 반복했던 기억들이 있다. 초반의 연애들에서는 상대방을 바꾸려 들었다. 최근의 연애들에서는 나를..

일상/2020~2022 2021.09.21

낭만적인, 로맨틱한

나는 낭만을 사랑하고 로맨틱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해왔다. 근데 최근에 무엇이 낭만적인 것이고 로맨틱한 것인지 점점 더 헷갈리는 기분이다. 낭만은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 '감미롭고 감상적인 분위기'라고 풀이하고 있다. 단어의 뜻을 찾다보니 낭만은 프랑스어 '로망(Roman)'을 소리대로 적은 일본식 한자표기라고 한다.(https://www.korean.go.kr/front/onlineQna/onlineQnaView.do?mn_id=216&qna_seq=130183) 즉 낭만적인 것과 로맨틱한 것은 원래 같은 뜻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단어들을 사용하는 구체적인 상황이나 맥락의 차이, 약간의 뉘..

일상/2020~2022 2021.09.20

아프지 않고 끝까지

2주만에 달리기를 했는데, 이번에는 아프지 않고 끝까지 달릴 수 있었다. 물론 목표거리를 하향하기도 했지만, 2주 전에 달렸을 때는 이미 2km 지점에서부터 배가 아픈 것을 참고 달렸었다. 2주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어플의 실시간 페이스는 쳐다보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목표거리는 3km로 하향했지만 마음가짐은 10km라도 뛸 수 있을만큼 천천히 뛰자는 마음가짐으로 출발했다. 8월15일 5.8km 러닝의 첫 1km는 4분48초, 9월5일 3.3km 러닝의 첫 1km는 4분50초였는데, 오늘 3km 러닝의 첫 1km는 5분50초였다. 반면 앞선 두번의 러닝에서는 뒤로 갈수록 km당 소요시간이 증가했지만 오늘 러닝에서는 마지막 1km가 4분50초였다. 일단 아무데도 아프지 않았고, 속도를 올리더라도 끝까..

일상/2020~2022 2021.09.19

관계

1. 이파람이 보내온 택배. 택배를 열어보는데 참 이파람답다는 생각을 했다. 내용물도, 포장도, 엽서도 다. 나는 미안한 것도 많고 힘들었던 것도 많고 그도 분명 그럴텐데, 고맙다고 해줘서 나도 고마워졌다. 헤어진 연인과 괜찮은 관계가 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물며 이혼이라니. 그랬었는데 작년 3월 법원에서 만난 뒤로 만난 적 한번 없어도 먼 발치에서나마 응원하는 마음이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 옛날에는 내가 없이 잘 사는 모습을 보면 내가 문제였나 싶은 자괴감이나 상대방에겐 내가 크게 의미있는 사람이 아니었구나하는 서운함같은 걸 느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다. 정말 잘 살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동안 배우고 성장한 만큼, 자신에 대해 알게 된 만큼. 나도 최선을 다해..

일상/2020~2022 2021.09.17

기억되다

좋아하는 사람과 얼마 전 속초에 갔었다. 그리고 그와 다시 한번 속초를 갈 계획을 잡았다. 이번엔 2박 3일로. 시작은 단풍이었는데, 단풍하자마자 설악산을 떠올렸고, 그래서 다시 한번 속초가 됐다. 이전까지 내게 속초라는 도시는, 내 고향의 근처 도시이고 군대에 있을 때 휴가갈 때마다 들러서 시외버스를 타야했던 도시이며 몇몇 고등학교 친구들의 고향 도시였다. 한마디로 크게 의미있는 도시는 아니었다. 아직 2박 3일 여행은 출발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속초'라고 하면 사랑하는 그 사람과 여행했고 여행할 도시라고 각인되고 있다. 이제 내게 속초는 그 사람의 도시로 기억될 거라는 게 새삼스럽게 신기한 기분이다. 예쁜 하늘을 보면 그가 생각난다. 별을 볼 때도 그가 생각난다. 특히 금성이나 목성을 볼 때는 더..

일상/2020~2022 2021.09.16

말이 닿는다

한때는 내가 말을 잘한다고 생각해서 거기에 취해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정말로 말을 잘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여러 사람 앞에서 적당한 말을 그럴듯하게 꾸며낼 수 있다는 게 말을 잘하는 걸까. 진심이 아닌 말을 잘 하지 못한다. 해도 티가 난다. 나도 굳이, 그렇게 열심히 진심인 척하고 싶지도 않아서 대체로 그런 채로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할말이 없어 말을 잃는 순간이 오기도 했다. 말을 해도 닿지 않는다는 기분만큼 나를 쓸쓸하게 하는 것도 별로 없다. 그 느낌이 말을 잃게 만든다. 말을 해도 닿지 않으니까 의미가 없고, 어떤 말을 어떻게 해도 오해만 늘어날 뿐이고 아무 소용이 없다는 무력감이 있었다. 이해라는 건 착각이고 환상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세상을 냉소해보기도 했다. 어차피 사람이 다른..

일상/2020~2022 2021.09.16

태풍

태풍이 온다는 뉴스를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다. 조금은 복잡한 마음이었다. 그에게 메시지를 보낼까, 그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을 따라도 되나, 아니면 지금은 그에게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가, 그가 홀로 서고 있다는 감각을 간직할 수 있게 지나치게 자주 연락하지 않는 게 나을까. 최근 한동안 매일 눈을 뜨자마자 기쁘고 고마운 마음들이 밀려오는 나날을 보냈다. 그건 정말 멋진 일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 느낌이 남아있고, 앞으로도 그 감각을 쉽게 잊지 않을 거란 걸 안다. 어제 요가에서 선생님은 내가 바다가 되어 밀물과 썰물을 바라보라고 했다. 우리가 속초에서 함께 본 바다를, 파도들을 떠올렸다. 잠에서 깨자마자 일어나는 감정들과 온갖 생각들을 밀물과 썰물을 바라보듯이 바라보았다. 밀려오고, 또 쓸..

일상/2020~2022 2021.09.15

그런 날

그런 날이 있다. 그냥 오늘만은 무조건 기대고 싶은 날, 한껏 투정을 부리거나 하소연을 해도 어떤 옳은 말도 충고도 조언도 하지 않고 그저 곁에 있어주었으면 싶은 날. 소리내어 얘기해본 적도 있었다. "그냥 오늘은 내가 너무 지쳐서, 오늘만 그냥 그렇게 해주면 안될까?"하고. 그렇지만, 아마 상대방도 그만큼 힘들었기 때문에, 보통 거절당했다. 오늘 내가 그토록 원하던 그 위로를 건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놓쳐버린 기분이다. 마음이 아프고, 많이 미안하다. 그 기분 아는데. 내 마음을 설명할 힘조차 나지 않는 그 느낌 아는데. 그걸 봐주지 못했다. 지금의 나는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힘이 있었는데. 내가 하고싶은 얘기, 내가 어려웠던 얘기도 물론 꼭 필요한 얘기고 상담하면서 상담선생님도 얘기해봐야겠..

일상/2020~2022 2021.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