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291

고수가 들어간 비트후무스 김밥과 토마토천도복숭아잼에이드

고수가 들어간 비트후무스 김밥과 토마토천도복숭아잼에이드 거의 5년째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고등학교 친구는 최근 건강검진에서 고지혈증과 지방간 진단을 받고, 살을 빼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약을 처방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살도 뺄 겸 한동안 쉬던 배달앱 알바와 식단관리를 다시 시작했다고 했다. 한두 달에 한번쯤 만나 밥 정도 같이 먹는 사이지만 은근히 죽이 잘 맞아서 얘기하다보면 온갖 얘기를 다 나누게 되는 친구다. 돈 없다며 늘 대충 먹는 친구에게 이 김밥을 먹일 수 있어서 기뻤다. 요즘 거의 하루에 한 끼만 먹어서 어제도 그게 유일한 끼니였다고 했다. 예약까지 한 식당에 메뉴가 김밥이라고 했을 때 약간 의아해했던 친구도 다 먹고 나오면서는 정말 좋아했다. 건강한 맛인 건 느꼈지만 이 ..

일상/2020~2022 2021.08.24

화장실 청소

오늘은 오후에 집에 손님들이 방문하는 날. 일어나 나갔더니 어느새 M이 고무장갑 끼고 화장실을 반짝반짝 청소하고 있었다. 보자마자 처음 떠오른 감정은 미안함, 그리고 그 미안함이 밀어올린 말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였다. 다행히 나는 다음 순간 최선을 다해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그 말을 듣는 건 어떤 기분일까를 떠올렸고, 미안하기보다 고마워졌고, 섣불리 말을 내뱉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말 대신 어떤 말을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 그냥 거실에 청소기를 돌리고 바닥에 물걸레질을 했다.

일상/2020~2022 2021.08.24

가을하늘

요즘 하늘이 참 예쁘다. 자주 올려다보게 된다. 바빠지면 쉬고 싶었고, 바쁘지 않으면 차라리 바쁘길 바랐다. 딱 적당히 바쁜 시기는 좀처럼 없으므로 자주 불만족스러웠다. 지금은 꽤 많이 바쁜 시기다. 잠도 많이 못 자고 있다. 그래서 약간 정신이 없고 복잡한 마음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래도 이렇게 바쁜 시기인데도 끼니를 챙길 때마다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럴 때면 어쩐지 안심이 된다. 다음주 월요일로 잡혔던 첫 상담이 화요일로 변경됐다. 지금까지 지원을 받아 두 번의 심리상담을 경험해봤는데 이번엔 조금 더 긴 호흡으로 받아보고 싶다. 나를 제대로 마주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일상/2020~2022 2021.08.21

얼갈이페스토와 콩국물 크림파스타

레시피의 두유 대신 콩국물을 쓰긴 했는데 크림파스타를 처음 해봐서 얼마나 넣어야하는지 전혀 감이 없었다. 인터넷에 조금 더 찾아보고 할 걸! 그렇지만 몹시 재밌었다. 퇴근하고나면 뭔가를 해먹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아서 이틀에 한번은 라면을 먹곤 했는데, 어제는 꽤 피곤한 나날인데도 집에 들어가자마자 '오늘은 그 레시피를 해볼까?'같은 마음이 들었다. 내 안에 그런 마음이 드는 걸 지켜봤다. 어쩐지 따뜻해지는 기분. 구체적인 레시피와 재료들이 갖춰져있는 덕분이기도 했고, 누군가의 정성 덕분이기도 했다. 그동안 나 혼자 먹으려고 요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혼자 먹는 건 최대한 간단하게, 설거지거리 안 나오게 하는 것에만 신경 썼다. 나 혼자 먹을 거여도 정성을 들여서 나 자신을 위해 요리한다는 상황을..

일상/2020~2022 2021.08.20

걸음이 느려졌다

어제 마음속으로 12시까지만 하자고 한 일이, 결국 1시 가까이 되어서야 끝났다. 끝나자마자 바로 잠을 청했다. 오늘을, 그리고 오늘 아침의 요가 수업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시계가 다섯시 반을 지나갈 즈음 몸을 일으켰다. 제일 먼저 한 일은 단호박포타쥬를 데우는 일이었다. 다섯시 반이라고 해도, 실은 마음이 꽤 조급했다. 샤워도 해야하고 요가수업하는 곳까지 가야하니까. 이동하는 시간만 해도 넉넉히 사십오분이 필요하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럴 때 시리얼을 후닥닥 해치웠다. 아마 3분쯤 걸렸을 것 같다. 좋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포타쥬를 나도 모르게 접시에 담고 보니, 나는 이걸 전자레인지에 돌리려고 한 건가, 아니면 차가운 채로 먹으려고 한 건가. 스스로에게 그렇게 묻고는 어쩐..

일상/2020~2022 2021.08.19

외면

그가 내 안의 공허를 거울처럼 되비쳐주기 전까지, 나는 내 공허를 철저히 외면하면서, 내가 공허하다는 것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평생 하지도 않다가 한 달 전에 시작한 주식 시세 보는 일을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온갖 단톡방에서 하루에 수백개씩 올라가는 메시지들에 참가하는 일도.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것들이 다 내 안의 공허를 외면하고 시선을 밖으로 돌리는 일들이었다는 걸 문득 알게 됐다. 특히 돈에 대해 생각할 때는 다른 것들에 대한 생각을 현저하게 덜할 수 있다. 왜 사람들이 돈돈돈 하면서 사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얼마를 모으지, 어떻게 모으지, 주식이 오르고 있나 내리고 있나, 뭘 사면 돈을 벌까, 언제 사야할까, 언제 팔아야할까, ..

일상/2020~2022 2021.08.18

잘 살고 싶다

아침에 팔굽혀펴기를 하다가 문득, "잘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음주에 상담 선생님을 만나면 무슨 얘길 하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왜인지 모르게 갑자기 "선생님, 저 진짜 잘 살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내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잘 산다는 게 뭘까, 내가 누군지 알고 싶다. 모호하지만, 그런 느낌이 있었으면 좋겠다. 섹스나 정신없이 분주한 일상이나 웃고 떠드는 시간을 아마 계속 사랑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시간들도 잘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들을 찾아헤매는 데 이제 그리 많지도 않은 소중한 에너지를 그만 쏟아부어도 괜찮은 사람이고 싶다. 정말 좋은 사람과 정말 건강한 관계를 맺고 싶다. 쉽게 끝나지 않는, 언제까지라도 서로에게 귀 기울일 것이라는 믿음이 단단한 바닥처럼 깔려 있는..

일상/2020~2022 2021.08.18

따뜻한 시선

요즘 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무반응은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는다"는 문장이 나왔다.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거의 없는 편이라 동생이랑 얘기할 때면 동생이 항상 답답해하는데, 그런 내게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기억이 하나 있다. 아마 분명 사소한 일이었다고 기억하는데, 내가 비명을 질렀다. 근데 옆방에서 들었을 게 분명한 어머니께서 나타나리라는 내 기대를 깨고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래서 이미 상황은 지나갔지만 더 크게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완전히 무시 당했다. 어른이 되고나서도 가끔 이 기억을 떠올렸지만, '나도 꽤 귀찮은 아이였구나 별것도 아닌 걸로 자꾸 피곤한 어머니를 신경 쓰이게 했으니', 하고 말았다. 다음주 월요일부터 심리상담을 받기로 했다. 그래서인지, 이 기억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결혼생활을..

일상/2020~2022 2021.08.17

존경하는 사람

나름대로 몇 번인가의 연애를 해봤지만, "존경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연애를 시작한 적은 없었다. 이전에 만났던 사람들이 존경할 만한 구석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어쨌든 연애감정과 존경심은 좀 다른 느낌이니까. "존경한다"는 말을 자주 쓰지도 않는다, 그런 마음이 드는 사람은 애초에 주위에 별로 없다. 내가 최근 몇 년 사이 그 말을 가장 자주 쓰는 사람은 내 여동생이다. 가족으로 수십 년을 지켜봐왔는데도 참 바르고, 밝고, 사려깊은 사람이다. 어머니께도 그렇고, 내 입장에선 충분히 흡족하진 않은 본인 남편에게도, 나에겐 조카인 딸 키우는 모습도 그렇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10년쯤 전에, 동생도 결혼하기 전에, "돈은 내가 벌테니, 오빠는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

일상/2020~2022 2021.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