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392

퇴근길

서울이 아름다운 도시라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내게 서울은 여행지가 아니라 일상의 공간이니까. 근데 요즘 자전거로 출퇴근하면서 서울도 아름다운 곳이라고 느끼는 순간이 참 많다. 어떨 때는 결국 자전거를 멈춰세우고 사진을 찍기 위해 핸드폰을 들어올릴 수밖에 없을 만큼. 출근할 때는 동쪽의 떠오르는 해를 향해 달리고, 퇴근할 때는 서쪽의 지는 해를 향해 달리게 된다. 매일 내 앞에 펼쳐지는 넓고 푸른 하늘과 노을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한 예쁜 야경이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한다. 출근하는 일이 늘 기쁠 수만은 없지만 그래도 페달을 밟으면서 몸에 들어온 활력과 풍경이 준 감동이 회사에 가는 일도 꽤 괜찮은 일로 느끼게 하는 것만 같다. 사실 많은 회사를 다녀보지 않아서, 일반적인 영리기업은 사실상 처음 다..

일상/2020~2022 2020.09.26

정념

어제의 모임 주제는 상호주관성과 정념이었다. 조금 더 하고싶은 얘기가 있었지만, 시간이 모자라서 할 수 없었다. 책에서는 정념(정열, 열정, passion의 번역)에 대해 치료가 필요한 일종의 정신병에 가깝다는, 부정적인 견해를 많이 소개하고 있다는 게 참가자들이 받은 느낌이었다. 나 역시 그랬다. 어제 모임에서 한 분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평온을 유지하고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 사는 게 꼭 좋은 건가, 그럼 무슨 재미인가하는 생각을 나도 했다. 근데 사실은, 모임에선 말하지 못했지만, 책의 그런 부분이 위안이 된 면도 있었다. 이젠 어떤 것에도 딱히 열정이랄 만한 게 없는 것 같아서 그게 고민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게 있어야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열정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내가 열정이..

일상/2020~2022 2020.09.20

정정

대흥역 근처에 정정이라는 식당이 있다. 딤섬 종류와 다양한 요리를 판다. 다 먹고난 지금도 이름도 잘 모르겠는 여러가지 딤섬과 요리들 - 꿔바로우, 크림새우, XO볶음밥 등 - 을 먹었다. 거길 가기 위해 2.5일 남아있던 연차를 하나 썼고, 1.5일이 남게 됐다. 가게 된 계기는 직장에서 점심을 같이 먹는 멤버 중 한 사람의 남자친구가 일하는 식당이어서다. 점심 먹으면서 하는 대화주제의 양대산맥 중 하나가 맛있는 것과 맛집 얘기기도 하고. 처음에는 퇴근하고 다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는데, 남양주에 사는 사람도 있고 퇴근시간엔 차도 많이 막히고 해서 계획이 좀 바뀌었다. 세 사람은 오후반차를 내고 난 아예 하루 연차를 냈다. 겸사겸사 오전에 건강검진도 받았다. 일반건강검진에서는 단백뇨를 제외하면 특..

일상/2020~2022 2020.09.19

좋은 하루

좋은 하루 보내라는 말을 흔히 주고받았는데, 좋은 하루를 보냈다고 느끼며 하루를 마감하는 날은 사실 그렇게 자주 있진 않다. 어제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오늘은 정말 좋은 하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 5시 전에 일어나 물을 한 잔 마시고 세 줄 시쓰기에 참여하는 짧은 시를 한 편 쓰고 책(싸움의기술, 정은혜)을 아주 조금 읽고 스트레칭하고 팔굽혀펴기를 50개했다. 남아있던 된장찌개를 먹고 면도를 하고 머리를 감고 평소 타던 따릉이가 아닌 하우스메이트에게 얻은 로드바이크를 타고 자전거 출근을 감행했다. 확연히 다른 속도감을 느끼며 출근을 해보니 59분이 걸렸다. 따릉이로 출근할 때는 1시간 15분에서 1시간 25분 정도 걸렸으니 분명 상당히 줄어든 시간이라고 봐야했지만 뭔가 더 줄어들길 바랐는지 아쉽..

일상/2020~2022 2020.09.15

열정

열정이 없다는 게 고민이었다. 지금은 열정은 고사하고 그냥 하고싶은 것도 없다는 게 고민이다. 어제 심리학 모임에서 이런 얘길 했다. 열정까지 가기도 전에 그냥 하고싶은 것도 없다고. 그래서 고민이라고. 격하게 공감하는 분도 있었다. 여러 얘기가 나왔다. 1) 하고싶은 게 꼭 있어야하나 물론 없어도 된다. 꼭 그런 게 있어야 사는 건 아니라고 나도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렇다면 굳이 살아야 하나라는 의문을 자꾸만 떠올리게 된다는 점에서 슬프다. 2) 배부른 고민 이렇게 거친 말을 한 사람은 물론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떤 얘기를 들으면서는 이 생각을 스스로 떠올렸다. 물론 이것도 맞는 말이다. 당장 생존과 책임 때문에 해야할 일을 쌓아놓고 있는 상황에서는 하고싶은 것을 생각할 겨를이 많지 않은 것도 ..

일상/2020~2022 2020.09.13

다시 자전거

여름이 끝났고, 오랜만에 다시 자전거 출근을 했다. 오랜만이었는데 욕심 부려서 퇴근까지 자전거로 하려다 결국 다리에 힘이 다 풀려서 성북구청에서 따릉이 반납하고 버스를 탔다. 그렇지만 잠실철교에서 본 저녁노을 덕분에 자전거 퇴근을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았다. 아침에 자전거 타는데 기분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2.5단계 격상되면서 택시로 출근할 때는 별로 출근하고 싶다는 마음이 안 들었는데 갑자기 기분이 너무 좋아서 나도 놀랐다. 땀이 날 정도로 몸을 움직이는 게 얼마나 내게 필요한 일인지 다시 느꼈다. 알아도 부러 운동하는 건 너무 귀찮은 내게는 어차피 하는 출근길에 타는 자전거가 딱이다. 직장동료들은 굳이 힘들게 자전거 타고 출퇴근하는 걸 몹시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안 그래도 힘든 출퇴근을 ..

일상/2020~2022 2020.09.13

노후준비

요즘 클래식 기타를 배우고 있다. 배우면서도 내가 왜 배우고 있는지를 스스로 묻고 있었다. "근데, 나 이거 왜하지?"라는 기분이랄까. 물론 기타는 전에도 배우고 싶어서 혼자 독학하겠다고 도전해본 적도 있었다.(클래식이 아니라 어쿠스틱이었지만) 음악과 악기는 항상 언젠가 배워서 잘해져서 즐기고 싶은 일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만으로 선뜻 레슨비와 기타 구입과 시간과 에너지를 쏟게 되진 않는다. 인스타에 잠깐 들어갔다 우연히 오래 전 좋아하던 인디 가수 곽푸른하늘이 올린 글을 봤다. 그의 인스타 프로필에는 클래식 기타 레슨 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게 계기가 되어주었다. 좋아하던 가수에게 직접 기타를 배울 수 있다니. 난 이제 나름대로 그럭저럭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는 직장이 있어 레슨비를 ..

일상/2020~2022 2020.09.09

못 갖춘 마디

못갖춘마디. 어제 배운 연습곡 21번은 못갖춘마디로 시작했다. 선생님이 못갖춘마디-라고 말했을 때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웃고나서 스스로도 당황해서 너무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라서, 라고 했는데 나도 왜 웃음이 났을까 다시 곰곰이 생각해봤다. 웃음을 유발하는 것 중 하나는 의외성이다. 일상적인 것이라도 그것이 있을 만하지 않은 상황, 엉뚱한 곳에 놓여있으면 웃길 수 있다. 기타레슨 받는데 못갖춘마디가 의외의 낱말은 아니지만, 내 인생에서 의외의 낱말이다. 학창시절 음악시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잘 못하는 과목이었기 때문이다. 필기는 괜칞았지만 노래도 춤도 악기도 내겐 늘 어려웠다. 평생 음악과 별 인연이 없다 여겼다. 10년 전 통기타를 독학하겠다고 뚱땅거려보던 시절도 있었는데도 그랬다. 그러다보..

일상/2020~2022 2020.08.28

운명적인 사랑

오늘 애니메이션 영화 ‘너의이름은’을 다시 봤다. 요즘 참여하는 심리학모임에서 보고 오기로 한 영화 중 하나여서다. 전에 봤을 때는 꽤 재밌게 봤었고, 이번에도 뭐 나쁘진 않았지만, 보고나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더 이상 운명적인 사랑을 믿지 않는구나. 로맨스를 좋아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해피엔딩인) 로맨스는 서로를 그리던 두 사람이 마침내 만나거나 사귀게 되는 이야기 혹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게 되는 얘기다. Happily ever after, 왕자와 공주는 결혼해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난다는 얘기다. 현실에서는 운명적인 만남도 어렵고, 우여곡절 끝의 결혼도 어렵지만 그러고 나서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지 않는다. 엔딩을 모르는 채로 이어지는 삶과 반복되는 ..

일상/2020~2022 2020.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