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정정

참참. 2020. 9. 19. 16:02

 

대흥역 근처에 정정이라는 식당이 있다. 딤섬 종류와 다양한 요리를 판다. 다 먹고난 지금도 이름도 잘 모르겠는 여러가지 딤섬과 요리들 - 꿔바로우, 크림새우, XO볶음밥 등 - 을 먹었다. 거길 가기 위해 2.5일 남아있던 연차를 하나 썼고, 1.5일이 남게 됐다. 가게 된 계기는 직장에서 점심을 같이 먹는 멤버 중 한 사람의 남자친구가 일하는 식당이어서다. 점심 먹으면서 하는 대화주제의 양대산맥 중 하나가 맛있는 것과 맛집 얘기기도 하고.

처음에는 퇴근하고 다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는데, 남양주에 사는 사람도 있고 퇴근시간엔 차도 많이 막히고 해서 계획이 좀 바뀌었다. 세 사람은 오후반차를 내고 난 아예 하루 연차를 냈다. 겸사겸사 오전에 건강검진도 받았다. 일반건강검진에서는 단백뇨를 제외하면 특이한 건 없었다. 단백뇨는 일시적인 거라면 괜찮은데 한 달 후에 다시 검사해서 지속적으로 나온다면 신장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한다고 들었다. 집에 체중계가 없어 몸무게를 혼자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63kg이었다. 170cm에 63kg이면 뭐, 나쁘지 않다. 목표는 근육을 더 늘려서 65kg에서 유지하는 것이다. 사실 이전에도 지금도 몸을 만드는 데 그리 큰 관심은 없었지만, 몸의 근육과 체력은 육체적으로 건강한 삶뿐 아니라 건강한 마음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외모를 위해서도 마음을 위해서도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자 한다.

하는 김에 치과에 들러 구강검진도 받았는데, (가정의학과와 치과 양쪽에서 다 예약을 안 하고 오시면 어쩌냐는 얘길 들었다.) 어금니에서 충치 하나가 발견됐고, 인레이 30만원 견적이 나왔다. 원래 다니던 치과에 가서 다시 진단 받고 거기서 치료받을까하다가 언제 또 예약하고 시간 맞춰서 마포까지 왔다갔다하나 싶어서 그냥 거기서 치료받기로 하고 본까지 다 떴다. 일주일 후 토요일 오전에 가서 끼우면 끝이다. 치과에서 예상밖의 치료까지 받게 되어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미용실을 간다는 계획은 포기하고 바로 집에 가서 기타를 가지고 다시 나왔다. 저녁에 날짜가 옮겨진 클래식기타 레슨이 합정에서 있었기 때문에.

호라이즌식스틴 이라는 디저트 가게에서 직장동료(와 그 남자친구 중 한 분)들을 만나 같이 마카롱과 빵을 구경하고 레몬 파운드 하나와 트러플소금바닐라맛 마카롱을 하나 샀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정정으로 이동했다. 식당에 도착해보니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건강검진으로 전날 저녁 9시부터 굶고 너무 배고파서 일단 먹고 생각하기로 했다. 음식은 나무랄 데 없이 맛있었고 진짜 다양한 종류로 충분한 양이 나왔다. 민폐를 끼친 게 아닐까싶을 정도로 서비스를 주시고 계산할 땐 가격까지 깎아주셔서 너무 잘 먹었다. 

그 뒤에 카페에 갔는데 그때부터 지갑을 찾기 위해 디저트 가게에 인스타 DM을 보내고 우리가 탔던 택시기사님의 전화번호를 찾아내서(티머니택시 분실물 센터에 전화해서 탔던 날짜와 결제했던 카드의 카드번호 등을 입력하면 승차했던 택시의 번호를 외우지 못했어도 알 수 있다.) 전화 드렸다. 결과는 양쪽 다 분실물이 없다는 답변. 도대체 어디서 잃어버린 건지 궁금한 마음과 어쩔 수 없으니 잊자는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당장 받았다. 우리 택시 타기 직전에 거기서 무슨 촬영을 하는 것 같은 분들이 있었는데, 촬영팀이라고 본인을 소개하시면서 혹시 지갑 잃어버리셨냐고 했다. 하하하. 그분이 친절하게도 근처 옷가게에 지갑을 맡겨주셔서 가서 찾았다.

2009년, 스무살 되던 해에 선물 받은 지갑이라 이젠 거의 음, 누가 봐도 바꿀 때가 됐다싶은 지갑이긴 한데 기능에 문제가 없고 딱히 원하는 지갑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계속 쓰고 있다. (실은 이혼하기 전엔 내 지갑을 보고선 예쁜 지갑을 하나 만들어주거나 사주면 얼마나 기쁠까하는 기대를 조금 가졌던 적도 잠깐 있었다.) 현금은 애초에 들어있지도 않았고, 길바닥에 흘린 것치고는 너무나 방금 가방에서 꺼낸 것처럼 그대로인 모습으로 돌아왔다. 지갑에 내 명함을 몇 장 넣고 다녔던 게 신의 한 수였다. 그게 없었으면 내 전화번호를 어찌 알았을까. 아마 그분이 찾아주려고 했어도 경찰에 전달하거나 우체통에 넣거나 해서 한참 걸렸을 것이다. 그럼 그동안 체크카드, 신용카드, 신분증, 사원증 다 정지하고 재발급 받고 또 잃어버린 게 뭐지하면서 상당히 마음이 쓰였을텐데, 참 운이 좋았다. 생쇼 끝에 해피엔딩, 동료들도 다들 너무 다행이라고 좋아해줬다.

직장동료들과 헤어지고 기타레슨까지 한 시간 정도 시간이 남았다. 기타레슨 받는 곳 근처에 작은책 사무실이 있어서 오랜만에 들렀다. 근데 6시에 갔더니 이미 퇴근하고 대표님만 계셨다. 알고보니 9시반 출근에 5시 퇴근이라고 했다. 네? 여기 한국인데요? 대표님이 "우리 좋은 회사야~"하고 너스레를 떠셔서 웃음이 났다. 통기타를 상당히 잘 치셔서 한달에 한번정도 남들에게 무료로 기타를 가르쳐주기도 하시는 선생님이다. 내가 돈 내고 통기타도 아닌 나이들어서 배우기엔 시간도 오래 걸리는데다 남들과 노래 반주하면서 가볍게 즐기기보단 혼자 곡을 연주하는 용도로 주로 쓰이는 클래식기타를 돈까지 내가며 집 근처도 아닌 거기까지 왔다갔다하며 1:1레슨 받으며 배운다는 것에 대해 상당히 아쉬워(?)하셨다. 하지만 난 내가 좋아하던 인디 가수에게 1:1레슨을 받는 성덕(성공한 덕후)이기 때문에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어차피 이거 배워서 언제까지 뭘 해야겠다는 목표같은 건 처음에도, 지금도 전혀 없는 그런 배움이다. 이런 배움이 나도 낯설긴 하지만 그럭저럭 즐겁다. 그 시간이 즐거우면 됐지, 뭐.

직장동료들을 회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 따로 만날 일이 생길 거라고 별로 기대하지 않았었다. 직장동료들은 대부분 성인이 된 이후에 내가 관계 맺어왔던 다른 사람들과는 결이 매우 다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사실,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도 막상 겪어보면 그것도 참 특이한 느낌이다. 뭐랄까, '이쪽이 주류구나'라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회사는 중소기업이고 뭐 애초에 주류, 비주류같은 걸 나누는 것 자체가 어렵고도 웃기는 일이긴 하지만, 나는 이성애자 남성이라는 걸 제외하면 스스로를 주류에서 좀 벗어나있다고 생각하긴 하니까. 여기서 자주 대화주제로 떠오르는 집이나 차를 산다거나, 재테크라거나 그런 일들에도 관심이 없고, 실은 맛집탐방에도 크게 관심은 없고(맛있는 걸 싫어한다는 건 아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지만 그리 강하지도 않고,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싶어하고, 노동운동과 환경문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관심이 있고(뭘 딱히 하고 있진 않지만), 다이어트나 헬스에 크게 관심 없고, 문학, 소설, 독서, 글쓰기, 건강한 마음에 관심이 있다. 대학교를 때려치운 경험과 활동가로서 일한 경험, 귀촌, 이혼의 경험이 있다. 여기서 쉽게 공감받을 수 있을 만한 경험들은 아니다. 

사실 그래서 그냥 직장에서 웃으며 같이 일하는 정도 이상으로 친해지긴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동료들과는 그 정도를 유지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무척 다행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나와 다른 정치적 견해나 사회이슈에 대한 이야기 같은 건 차라리 언급이 안 되길 바랄 때가 더 많다. 불편하고 싶지 않은 얄팍한 마음에. 

그럼에도 밥을 같이 먹고, 회사에서 다른 부서들 지원하며 상사나 다른 팀으로부터 받는 우리 입장에선 이해하기 어려운 지시나 요청, 처우 등에 대해 얘기하고 맛있는 것들에 대해 얘기하다보니 그래도 나도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애초에 그들이 딱히 날 막으려고 한 적도 없지만, 내가 스스로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니까. 날씨는 좋고 음식은 맛있고 지갑 잃어버린 것때문에 약간 정신없는 와중에도 기분이 참 좋았다. 뭘 이렇게 자꾸 놓고 다니냐는 핀잔에 걱정해주는 마음이 느껴져서 웃음만 나왔다.

코로나 때문에 다른 만나는 사람도 거의 없고, 어쩔 수 없이 일상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회사다보니 직장에서의 관계가 내 일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새삼 느낀다. 이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앞으로 이 회사에 같이 다닐 날(우리 네 명 중 누군가가 그만둘 날)이 얼마나 남았을지는 현재로서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지만 지금은 같이 다니고 있다는 데 감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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