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좋은 하루

참참. 2020. 9. 15. 05:20

 

좋은 하루 보내라는 말을 흔히 주고받았는데, 좋은 하루를 보냈다고 느끼며 하루를 마감하는 날은 사실 그렇게 자주 있진 않다. 어제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오늘은 정말 좋은 하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 5시 전에 일어나 물을 한 잔 마시고 세 줄 시쓰기에 참여하는 짧은 시를 한 편 쓰고 책(싸움의기술, 정은혜)을 아주 조금 읽고 스트레칭하고 팔굽혀펴기를 50개했다. 남아있던 된장찌개를 먹고 면도를 하고 머리를 감고 평소 타던 따릉이가 아닌 하우스메이트에게 얻은 로드바이크를 타고 자전거 출근을 감행했다. 확연히 다른 속도감을 느끼며 출근을 해보니 59분이 걸렸다. 따릉이로 출근할 때는 1시간 15분에서 1시간 25분 정도 걸렸으니 분명 상당히 줄어든 시간이라고 봐야했지만 뭔가 더 줄어들길 바랐는지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역시 빨라야 5분, 과속은 이제 그만인가.

회사에서 샤워를 하고 머리를 다시 감고 자전거탈 때 입고 온 옷을 물에다 손으로 대충 빨아서 짜서 널어놓았다. 사무실 자리를 옮기는 분이 계셔서 컴퓨터를 다른 층에서 가져다가 설치해드렸고 휴게실을 청소했다. 딱히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이었는데 회사 쇼핑몰에서 하는 이벤트를 더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이것저것 개선하는 작업을 했다.

점심에는 밥 같이 먹는 직원이 오리고기를 싸와서 나눠줬다. 다른 직원이 다 못 먹을 것 같다며 처음부터 덜어낸 밥도 얻어먹었다. 이번 자전거는 바구니가 없어서 짐을 들고 타기가 어렵다. 백팩은 오래 타다보면 별 게 안 들었는데도 무겁게 느껴지고 등이 땀으로 다 젖고 만다. 어젯밤에 졸린 눈을 비비며 자전거에 매다는 가방을 찾아보게 됐다.

6시 1분에 사무실을 나와서 다시 자전거를 타고 상담에 갔다. 결국 이미 예상했던대로 7시까지 도착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지하철타는 것보다는 더 빨리 도착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생애 첫 심리상담의 첫번째 회기, 50분의 상담을 마쳤다. 사실 그동안 친구들에게도 한 적이 있는 이야기들이었고 내 안에서 어느 정도 정리된 일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얘기를 하다보니 꼭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결국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상담사선생님이 많은 말씀을 하시진 않았지만 어쩐지 위안이 됐다. 그저 누가 잘 들어주고 그 일들을 겪으며 느꼈을 심정에 대해 공감해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도움이 된다는 걸 새삼 느낀다. 상담을 내 돈 내고 받고자 하면 도저히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가격이라 돈을 떼어놓고 뭔가를 생각할 수 없는 생활인으로서는 그 돈을 내고 겨우 들어주는 거야? 싶은 마음이 그동안 살면서 없지 않았다. 상담을 결국 받아본 적도 한번도 없었고. 근데 들어주는 거, 절대 쉬운 일 아니다. 그리고 현대까지 연구된 사람의 심리와 마음에 대해 오랫동안 공부해온 전문가들이다. 친구와 얘기할 때와는 다른 안정감이 있다. 친구한테도 차마 못하는 얘기도 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마지막에 정리하며 다음 시간부터, 라고 하면서 오늘 나눈 이야기를 정리하고 앞으로 이 상담을 통해 내가 어떤 것들을 얻을지 이야기해주신 부분이 특히 좋았다. 나아가고 있는 것 같고 나아질 수 있다는 게 너무나 분명해보여서. 

출근에 이어 퇴근까지 자전거로 하고 중간에 한시간 상담을 받고 오니까 너무나 배고프고 졸렸다. 라면물을 올려놓고 끓는 동안 그래놀라를 아몬드브리즈에 말아 먹고는 라면을 먹고, 빨래를 걷고 겨우 씻고 잠자리에 누웠다. 밤 10시 반, 누군가는 "그 시간에 잠이 와요?"라고 하는 그 시간에 나는 더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졸렸다.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졸려질 만큼 하루를 살았다는 게 기분이 좋았던 걸까. 참 좋은 하루였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그걸 글로 남길 수 없을 만큼 졸려서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잊지 말고 써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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