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열정

참참. 2020. 9. 13. 08:37

 

 

열정이 없다는 게 고민이었다. 지금은 열정은 고사하고 그냥 하고싶은 것도 없다는 게 고민이다. 어제 심리학 모임에서 이런 얘길 했다. 열정까지 가기도 전에 그냥 하고싶은 것도 없다고. 그래서 고민이라고. 격하게 공감하는 분도 있었다.

여러 얘기가 나왔다.

1) 하고싶은 게 꼭 있어야하나
 물론 없어도 된다. 꼭 그런 게 있어야 사는 건 아니라고 나도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렇다면 굳이 살아야 하나라는 의문을 자꾸만 떠올리게 된다는 점에서 슬프다.

2) 배부른 고민
 이렇게 거친 말을 한 사람은 물론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떤 얘기를 들으면서는 이 생각을 스스로 떠올렸다. 물론 이것도 맞는 말이다. 당장 생존과 책임 때문에 해야할 일을 쌓아놓고 있는 상황에서는 하고싶은 것을 생각할 겨를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니까. 근데 빚을 지고, 애를 낳고(나한테 그러자는 사람도 없지만), 돌아볼 시간없이 급급한 일상으로 나를 밀어넣는 건 해결책이 될 수 없을 것 같다. 견딜 수도 없을 것 같고.

3) 열정의 어원
 "열정이라는 의미의 “passion”이라는 말은 라틴어 pati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to suffer, endure”의 뜻으로 고통을 겪었다, 견디어 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를 더 추적해 보면, “sufferings of Christ on the Cross”의 의미가 나타난다."(출처: www.ssu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947)
 열정이란 게 고통, 고난, 견딘다는 의미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퍽 새로운 느낌을 줬다. 열정이 있다면 그 정도는 견뎌야지! 따위의 말은 무척 싫어하는데, 그 견딘다는 것이 바로 열정이라는 건, 남에 의해 강요받는 것만 아니라면, 꽤 의미심장하고 멋진 일이다. 사실 열정을 가진 사람을 보는 건 멋지고 기분좋은 일이다. (내 기준에서일 수밖에 없겠지만)그릇된 열정만 아니라면 보통 응원하고 싶어진다.

4) 코로나 블루
 코로나 블루를 앞서서 겪고 있는 것일 수도, 뉴노멀을 만들어가는 민감한 첫 세대일 수도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확실히 이 무기력엔 코로나 블루적인 성격이 섞여있다. 누굴 좀 더 만난다면 꼭 뭔가가 하고싶지 않더라도 일상이 더 견딜만 했을 거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 자체도 하고싶은 일이고 일상에 계속 의미를 부여해주는 일이니까. 누군가에게 내가 어떤 관계로, 어떤 존재로 조금이나마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 산다는 걸 의미있게 해주는 면이 몹시 크다. 적어도 내겐.

5)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돌아보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추구했다기보단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어느 정도 성공할 것 같은 일만 해온 것 같다는 것에 본인 스스로 꽤나 충격을 받았었단 얘길 하셨다. 많은 분들이 공감하셨다. 나도 공감한다. 근데 사실 말은 못했지만, 그건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싶다. 물론 세상엔 가끔 아닌 사람들도 있다. 정말 누가 봐도 불가능할 것 같은 것을 하고싶다는 이유만으로 도전하는 사람들. 근데 어쩌면 그 사람들도, 그 사람의 세계에서는 그게 그렇게까지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누구나 각자의 세계를 사니까.
 내가 대학교를 그만둔 것도 누군가에게는 "그렇게나 어려운 선택을 어떻게 했어요?"라고 느껴지는 일이지만 내 세계에서는, 물론 쉽게 내린 결정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내가 그로 인해 정말로 굶어죽거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판단했다면 나도 그런 선택은 못했을 것이다.
 그 고백을 들으면서 그것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도전적이고 열정있는 사람이어서, 가 아닐까, 라고 나는 느끼고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최근까지도 게임을 상당히 많이 했고, 내 삶에서 열정을 갖고 한 일이 얼마 없는데 그나마 그에 가장 가까운 것 중 하나는 게임이다. 근데 게임의 큰 매력이 바로 쉽다는 것이다. 너무 쉬운 게임은 매력이 없지만 보통은 재밌는 게임일수록 적당히 어려운 듯하면서도 결국은 해결할 수 있는 과제를 끊임없이 던져주게끔 설계되어있다. 세상에서 가장 성취감 느끼기 쉬운 건 바로 게임에 접속하는 일일 거다. 내가 1시간을 사냥하면 반드시 레벨이 오르고 반드시 강해진다. 현실과는 다르게 내가 한 만큼 무조건 보상받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참 쉽다.
 학창시절엔 몰랐지만 게임 다음으로 그나마 노력에 비례하게 성과가 나오는 건 공부다. 특히 시험공부. 절대 쉽진 않고 아무리 노력해도 100점은 보장할 수 없지만 적어도 80~90점 정도까지는, 모든 사람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독해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노력 여하에 따라 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다른 분야들에 비하면 노력으로 어느 정도 운이나 재능, 기타 등등의 요소를 커버해낼 수 있는 곳이랄까.
 나도 불가능한 꿈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늘 좋아했고, 그런 사람들을 존경하고 동경해왔다. 20대에는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도 조금은 품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어쩌면 선생님의 말대로 난 조금 지쳤나보다. 꽤 쉬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더 쉰다고 해서 이 '지침'이 씻은 듯 사라질 일이 있을까싶긴 하지만 어쨌거나 살아간다는 것에 좀 지쳐있다는 느낌을 스스로도 종종 받을 때가 있다. 게임도 같이 하는 사람이 재밌지 않는 이상엔 이젠 재미가 없다. 전과 달리 혼자서는 어떤 게임에도 거의 접속하지 않게 됐다.

6) 그럼에도
 재밌는 건 이 코로나 와중에 살고 있는 내 일상을 들여다보면, 내 마음과 기분을 살짝 접어두고 제 3자의 시각으로 봤을 때는 나쁘지 않아보인다는 것이다. 우선 위에서 언급한 심리학모임을 매주 토요일마다 하고 있다. 대면일 때보단 아쉬운 면이 있지만 화상모임의 아쉬움을 감내하면서도 계속 참여하고 있다. 대단히 열심히 공부를 하진 않지만 보고 오라는 유튜브 강의는 한번씩은 보고 가고 책도 읽는 척은 하고 간다. 나를, 내 감정을, 내 마음을 더 알고 싶고 더 나아지고 싶다는 마음도 있고 내 얘기를 하고 싶고 다른 사람들의 얘기도 듣고 싶은 마음이다.
 매주 화요일에는 클래식기타 레슨을 받고 있다. 대단히 하고싶은 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즐거움도 느낀다. 애초에 그렇지 않다면 시작도 안했을 거고. 지금도 종종 내가 이 정도의 비용과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할 만큼 이걸 하고싶은지 스스로 의문을 갖지만 어쨌든 계속 하고 있다는 것이 결국 실은 그 정도로 하고싶다는 걸 증명하는 건 아닐까?
 내일 월요일부터는 청년활동지원센터의 마음건강지원사업의 도움으로 생애 첫 상담을 받는다.
 직장에서는 심지어 긍정적인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 말을 처음 들었을 땐 놀랐지만 다시 제 3자의 시각으로 직장에서의 내 모습을 바라보니 나름대로 말도 잘 하고 잘 웃는 편이고 소통에도 크게 문제가 없고, 요청 들어오는 업무에 대해 능력이 닿는 선에서 적극적으로 피드백도 하고, 처리해내고 있다. 업무능력 향상을 위해 퇴근 후나 주말에 추가로 공부해야지라고 생각했던 입사 당시의 생각은 입사 2주 만에 집에선 그냥 쉬자-로 바뀌었다. 그 뒤 6개월차인 지금까지도 집에서 일이나 일 관련 공부를 해본 적이 그리 많지 않아서 스스로도 좀 아쉽긴 하지만, 회사에 있는 동안만큼은 꽤 집중하는 것 같아서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긴다. 억지로, 어설프게, 밀도 낮게 긴 시간을 투자하는 것보단 할 때 집중해서 하는 게 무조건 좋은 일이니까.

 

왜 사는지, 살면서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고 그걸 어떻게 찾아야할지도 잘 모르겠지만,
가끔은 계속해서 살아갈 이유가 있는 건가하는 생각도 여전히 찾아오지만,
그래도 종종 누군가와 맛있는 걸 먹으면서 웃고 별 의미없는 얘길 떠들고,
내맘같지 않은 손가락을 원망하면서도 가끔은 선생님의 격려에 힘입어 기타를 붙들고 악보를 들여다보고,
자전거 타다 예쁜 하늘이라도 보게 될 때는 아름답다 느끼며 감동하고,
꾸준하지도 않고 나아지고자 하지도 않는 글이나마 누군가가 잘 보고 있다고 한 마디한 것에 힘입어 또 몇글자 써보는 지금이
그럭저럭 살만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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