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291

정신차려보니 신입사원

시골 살고 싶다고 서울을 떠났는데, 3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돌아오고 보니 별 기술도, 경력도 없는 데다 대학도 그만둔 30대가 되어있었다. 나름 작은 청년 단체에서 3년 넘게 일하며 대표도 맡았었는데 그건 어디서 경력으로 쳐주지도 않았다. 처음엔 야속했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딱히 업무능력이라고 할 만한 걸 익히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엑셀이니 파워포인트니 하는 것들은 대학생들 과제할 때 쓰는 수준에 자격증도 없는 데다 공공기관과 일할 때 필요한 제안서나 공문서라도 많이 만들어본 것도 아니다. 기획서를 잘 쓴다거나, 명백하게 성과가 나온 프로젝트 이력이 있거나, 다른 내세울 능력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하나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시골에선 학원 강사였는데, 그것도 사교육 시장 아니면 쓸 데가 별로 없..

일상/2020~2022 2020.03.08

성장

나아지고 있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주는 만족감이 상당하다. 금요일엔 근로계약서를 썼다. 비록 올해 연봉은 상당히 낮은 수준으로 책정됐고 수습 3개월은 그나마도 80%라 사실상 최저임금도 안 되는 월급이 나올 것 같지만(수습기간동안은 최저임금의 90%만 줘도 최저임금법 위반이 아니라고 한다.), 어쨌거나 수습기간만 지나면 최저임금보다 쪼끔은 더 받을 것이고 무엇보다 아무 대책없이 갑자기 해고될 일은 딱히 생기지 않으리라는 데서 오는 안정감도 나쁘지 않다. 나만 잘 하면 내년엔 얼마나 올릴 수 있을지가 문제지 분명히 연봉도 올릴 수는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5일 출근한 지금 내가 회사에서 맡은 '업무'라고 할만한 것들은 사실 굳이 프로그래머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이 대부분이었고, 그..

일상/2020~2022 2020.03.08

가혹해지지 말자

저녁밥도 안 먹은 채로 집에 도착한 게 8시였다. 어찌 보면 늦고 어찌 보면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닌 것 같은, 그러나 아침 7시 반에 집에서 나간 내가 지치기엔 충분한 시간. 집에서는 예고되었던 양주 마시는 모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하우스메이트 둘과 오랜만에 보는 한 사람, 그리고 처음 뵙는 분이 두 분 있었다. 공부해야하는데, 하면서도 저녁 식사 겸해서 자리에 앉아 한 잔, 두 잔 받다보니 어느새 같이 재밌게 마셨다. 그러다보니 열두 시가 다 되었다. 잤고, 6시에 일어났다. 오늘의 업무를 위해서 공부해야할 게 있었는데 사실 아무리 해도 모자란 게 공부지만, 역시 조바심이 났다. 그러다 다시 한번 생각했다. 너무 가혹해지지 말자, 나 자신에게.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자..

일상/2020~2022 2020.03.06

녹초

오늘은 꽤 지쳐서 돌아왔다. 아침에도 좀 부랴부랴 나갔는데 택시기사와의 대화도 썩 유쾌하지 않았고. 사실 택시 출퇴근이 생각보다 별로다. 시간은 조금 줄어들지만 길 막혀서 큰 차이도 없고 더 답답하다. 멀미도 꽤 많이 나서 뭘 할 수가 없다. 난 오히려 지하철 타는 게 훨씬 더 편한 것 같다. 처음으로 사장님을 뵐 기회가 있었다. 또 인사 드리러 가겠지만, 오늘은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해봤다. 나같은 말단 신입이 들어갈 회의였나 싶긴 했지만 지금 진행되고 있는 핵심적인 새 프로젝트의 내용을 잘 알게 됐다. 회사에 프로그래머가 왜 필요한 지도 뼈저리게 느꼈는데 문제는 내가 그걸 수행하려면 한참 더 공부해야 한다는 것. 에고. 컴퓨터한테 시킬 수 있는 일을 사람들이 고생해서 해야한다 생각하니 당장은 내 능력 ..

일상/2020~2022 2020.03.04

화요일

어제는 출근하면서 주로 5호선을 탔는데 오늘 출근엔 주로 2호선을 탔다. 생각보다 2호선도 사람이 없었다. 코로나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간은 거의 똑같다. 1시간 7분. 막상 지하철에 타고 있는 시간은 그렇게 길진 않은데 이래저래 걷고 갈아타는 시간이 길다. 이 정도면 나쁘진 않은 정도라는 느낌이다, 아직까지는. 근데 회사 지침으로 앞으로는 당분간 택시 타고 출퇴근해야할 것 같다. 역시 코로나 때문이다. 직원들이 사람 많은 곳은 되도록 피하길 바라는 회사의 마음이랄까, 나쁘진 않다. 출퇴근길 정체만 조금 피할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오늘은 본격적(?)으로 업무가 생겼다. 일단 매일 해야하는 일로 하나 받은 것은 단순한 일이다, 실수하지 않고 변수가 생겼을 때 제대로 보고하고 대처할 수만 있..

일상/2020~2022 2020.03.03

첫 출근

첫 출근을 했는데 뭔가, 음. 이등병 때 자대 가서 뭘 해야할지 어디에 있어야할지 무슨 생각을 해야할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던 그 느낌이었다. 우습지만 참 난감하다. 일단 건물에 들어갈 키가 없었고, 다른 사람과 함께 들어갔지만 2층부터 6층 중에 내 사무실이 어느 층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층에서 어색하게 서있자 한 여자분께서 어떻게 오셨냐고 물으시더니 5층으로 안내해주셨다. 내 자리는 아직 없었고 컴퓨터도 없었다. 컴퓨터는 11시쯤 왔다. 그 전엔 노트북으로 잠시 단순한 작업을 했다. 근데 그나마의 작업이 끝나고 상사는 외근을 나갔고, 내게 주어진 일은 없었다. 점심은 다른 팀의 입사 약 10개월차 정도 되는 남자분과 둘이서 먹었다. (그래도 내가 더 신입이라고 밥을 사주셨다, 안 그래도 ..

일상/2020~2022 2020.03.02

얼마나 감사한지

잊지 않기 위한 기록. 공부를 시작한지 겨우 두 달 남짓, 냉정하게 봤을 때 아직 업무를 수행할 능력을 갖췄다고 보긴 어려운 상태에서 배우면서 그 직무를 수행하는 일자리를 얻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행운인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렇게 커리어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서른한 살에 오다니, 그 전까지 아무런 관련도 없던 분야, 관심은 있었지만 경력은커녕 이렇다할 기초지식이나 경험조차 거의 없던 분야에서! 학원을 그만두고 여행을 다녀오고, 이사를 하고, 그런데 그 여행기간까지 합쳐도 불과 약 세 달 만에, 그 중 두 달은 그것만으로도 생계는 유지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 했는데도 이런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가. 여기서 감사히 여기고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일하고 싶은 이 ..

일상/2020~2022 2020.02.29

갑자기

얼떨결에 취직해서 갑자기 다이소 알바를 그만두게 됐다. 아무래도 사람 구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갑자기 그만두는 것이다보니 같이 일하는 분들께 죄송했는데, 서운해하시면서도 취직해서 간다고 잘됐다고 축하해주시고 한 분은 고생했다며 초콜릿까지 사주셨다. 두 달 일했는데, 좋게 봐주시고 늘 많이 도와주시고 항상 잘해주셔서 일하는 내내 사람 때문에 힘든 건 정말 없었다. 고맙고 죄송하고, 마스크 때문에 오픈 전부터 엄청나게 줄이 늘어서고 직원들이 마스크 구입하는 것에 대해서도 고객들이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는 이런 어려운 시국에도 상냥함을 보여주셔서 감동 받았다.

일상/2020~2022 2020.02.29

진짜요?

여차저차해서 소개를 받아 한 기업에 면접을 보고 왔다. 웹 프로그래밍을 해줄 사람을 뽑는 거였는데, 솔직히 내가 너무 초짜여서 추천을 받긴 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민망한 면이 있었다. 이력서에도 프로그래밍 관련 경력은 하나도 없었고, 면접 질문에서 구체적으로 어떠어떠한 걸 할 줄 아는지, 해봤는지 물어보는 질문에 90% 이상 해본 적 없고, 모르는 분야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것들은 아예 무슨 질문인지 알아듣지도 못할 정도였다. 당연히 안 될 줄 알았는데 뭐든 빨리 배우는 편이고 프로그래밍을 앞으로의 직업으로 삼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한 것 때문인지, 결국 대학 졸업장은 못 땄지만 그럴 듯한 학교에 입학했었다는 고교 시절의 학습능력에 대한 믿음 때문인지, 아니면 추천해준 사람의 명망 덕분..

일상/2020~2022 2020.02.28

공부

코딩을 공부하고 있다. 최근에 웹 프로그래밍 쪽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하다보니 생활코딩(https://opentutorials.org/course/1)이라는 강의를 알게 되고, 들어보게 됐다. 다른 걸 듣다가 WEB1 강의를 찾아보게 됐다. 듣다보니까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인터넷과 웹의 차이도 잘 모르고 있었는데, 그런 개념들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html의 기초와 뼈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와 관련된 통찰들이 멋지다. 공부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찰하게 하고, 공부의 의미, 뻔한 소리가 아니라 정말 기초가 왜 중요한지 특히 현대사회에선 왜 더 그런 면이 있는지에 대한 고찰, 접근성과 모두에게 공개되어있는 정보와 툴이 갖는 의미 등. 단순히 웹페이지를 만들어내는 언어와 문법에 대한 지식..

일상/2020~2022 2020.02.27

마음가짐

머리로는 아는데 늘 실천이 잘 안되는 것, 마음가짐의 문제. 요즘 다이소 알바가 슬슬 하기 싫고(어제는 비 맞으며 일해서 더 그랬나), 얼른 어디 직장에 취직해서 적어도 200은 넘는 월급 받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했다. 그랬는데 오늘 새벽에 잠에서 깨서 문득 가진 것에 감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런 맘을 먹고 생각해보니 이 알바 처음 구했을 때 내가 이 알바를 꽤나 맘에 들어했던 기억이 났다. 집에서 엄청 가깝지, 하루에 3시간만 일하지, 그거에 비하면 돈도 나쁘지 않지. 적어도 굶을 걱정없이 공부를 하거나 뭔가를 준비할 수 있는 일이다. 몸 쓰는 일이라 몸은 약간 피곤하긴 해도 딱 일하는 시간만 끝나면 더이상 생각할 것도 없고 크게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는 일이라서 좋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코로나..

일상/2020~2022 2020.02.26

소속감

커뮤니티의 추억이라 하면 나도 떠오르는 커뮤니티가 하나 있다. 중학생 시절 한창 열심히 활동했던 한 게임회사 팬사이트다. 게임도 아니고 게임제작사의 팬사이트라니? 지금 생각하면 참 신기하게 느껴지지만 당시엔 아직 소위 CD게임이라고 하는 국산 패키지게임 시장이 조금은 남아있을 때여서 그런 일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 시장은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2000년대 중반 즈음엔 소멸해버리다시피 했다. 현재는 '스팀' 등의 훌륭한 플랫폼(더 이상 음악을 듣기 위해 '음반'이란 물건을 살 필요없이 온라인으로 비용을 지불하고 이용하는 것과 비슷한 게임 분야의 플랫폼)이 있지만 그런 게 없던 당시엔 불법복제 CD와 웹사이트나 P2P 등을 통한 불법다운로드로 게임을 이용하는 사람이 무척 많았고, 그런 문화가 소수 인원이 ..

일상/2020~2022 2020.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