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291

어둠이 짙어져가는 날들에 쓴 시

「어둠이 짙어져가는 날들에 쓴 시」, 메리 올리버 해마다 우리는 목격하지 세상이 다시 시작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풍요로운 곤죽이 되어가는지. 그러니 그 누가 땅에 떨어진 꽃잎들에게 그대로 있으라 외치겠는가, 존재했던 것의 원기가 존재할 것의 생명력과 결합된다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진실을 알면서. 그게 쉬운 일이라는 말은 아니야, 하지만 달리 무얼 할 수 있을까? 세상을 사랑한다는 우리의 주장이 진실이라면. So let us go on, cheerfully enough, this and every crisping day, 그러니 오늘, 그리고 모든 서늘한 날들에 우리 쾌활하게 살아가야지, though the sun be swinging east, and the ponds be cold and black,..

일상/2020~2022 2021.06.11

단 한 사람

페이스북이 알려주길, 작년 6월 6일의 나는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저렇게 긴 수술을 받으러 수술실에 들어갈 일이 생긴다면, 드라마에서 저 많은 사람들이 그러듯이 밖에서 기다려줄 사람이 있을까"라는. 어이가 없었다. 페이스북이 아니었으면 아마 몰랐겠지만, 1년이 지난 오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결론이라고 부정해봐도, 결국 내 곁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종종 찾아오곤 한다. 그럴 땐 아니타 무르자니의 에 나오는 "이 세상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더라도..."하는 문장을 떠올린다. 지금 나는 정혜신의 를 읽고 있다. 눈물과 한숨과 함께 읽는다. 옆에는 지난번에 사두고 아직 읽지 못한 이라는 제..

일상/2020~2022 2021.06.06

쾌락주의자

20대의 나는 의미를 쫓으며 살았다, 고 생각한다. 사실, 태어나서 살고는 있지만, 내가 의식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태어난 의미라거나 삶의 의미라는 것에 대해 도무지 그런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고야 만다.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이성과 과학의 논리로 보면 그렇다. 물론 아직까지 밝혀지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현재까지 인류는 신(그게 대체 뭔지 정의부터 내려야하겠지만)의 존재같은 건 밝혀내지 못했다는 걸 인정한다면, 현 시점에서는. 뭔가 의미있는 것들이 좋아보였다. 그런 것들이야말로 삶에 의미를 부여해준다고 믿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것"을 추구하는 것을 통해 내 삶이 어떤 의미를 얻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내 생각의 일관성을 행동과 삶으로도 유지하며 살고싶..

일상/2020~2022 2021.06.04

요가지향

화요일, 목요일 아침에 요가지향 로카의 요가수업을 듣기로 했다. 시간은 아침 7시-8시. 회사에서 걸어서 30분 거리. 출근은 9시반까지니까 끝나고 출근할 시간은 넉넉하다. 아침밥도 먹을 수 있을 정도. 그의 요가수업에는 항상 관심은 있었지만 이렇게 정말 배울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어떻게 보면 모든게 운명처럼 느껴진다. 그가 이 근처에서 아침 요가수업을 하고있는 이때 내가 마침 이쪽으로 회사를 옮긴 것도,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우리 회사 출근시간이 9시반인 것도, 수업시간이 8시-9시에서 7시-8시로 이번달부터 변경된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일상에 변화가 필요한 시기였다. 좀 심심한, 날들이었는데 지금 만나기에 딱 좋은 즐거운 일. 게다가 몸에도 마음에도 도움되는 일. 지난주부터 점심만 ..

일상/2020~2022 2021.06.03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서문

'누구도 아픈 것 때문에 아프지 않길 바란다.' - 중 서문을 읽는데 벌써... 나는 그동안 "아프다는 것"을 어떤 관점으로,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나, 생각하게 된다.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도 아닌데 아픈 사람한테 왜 뭐라고 하냐는 정도의 마음은 있었지만. 아픈 사람이 아픈 것조차 그 사람의 탓으로 돌리면서 아픈 걸 죄로 만드는데 일조하진 않았나 반성. 남의 아픔에 대해서도 나의 아픔에 대해서도 더 다르게 생각해봐야겠다.

일상/2020~2022 2021.06.01

책을 샀다

교보문고에 , 와 함께 을 주문했는데 품절이라며 환불돼버렸다. 급하게 회사 근처 알라딘 중고서점(출판시장을 교란한다는 이유로 그동안 이용 안했는데.. 품절이라니까ㅠ)에 검색해보니 한 권 있었다. 퇴근하자마자 뛰어갔는데 이런! 그새 팔렸다! 억울한 마음에 다른 책을 샀다. 전에 읽어보고 싶었던 김보통 작가의 에세이 사려고 했던 물건이 없다고 다른 물건을 사오는 건 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행복하면 됐다. 덧) 최근 섭스의 글을 읽고 느낀 바가 많아서, 책 사는 데 고민을 덜하기로 했다. 내 돈으로 책을 사기 시작한 후로, 또 자주 이사를 다니며 책이 얼마나 짐인지 알게 된 후로는 읽지 못할 책은 절대로 사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근데 설령 사놓고 못 읽는다해도 사고싶은 책은 사자. 많이 사야 그중 일..

일상/2020~2022 2021.05.29

고무카아사나(소머리자세)

김소연 시인의 마음사전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기적 - 소리도 없이 조용히 도착한다, 믿고 있는 한.' 처음 봤을 때부터 어쩐지 계속 마음에 들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 안 나지만 매일 아침마다 요가소년의 15분 모닝요가를 틀어놓고 따라한지가 어느새 세 달이 넘었다. 며칠 전부터 고무카아사나(소머리자세)할 때 영원히 절대 닿을 것 같지 않았던 아래로 돌린 오른손과 위에서 내려간 왼손의 손가락 끝이 닿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양쪽 다 안 닿았는데 일주일 정도 지나자 왼손을 아래로 오른손을 위로 했을 때는 닿기 시작해서 곧 맞잡고 당길 수도 있게 됐었다. 그러나 좌우균형이 어지간히 틀어졌는지 반대쪽은 근처에도 가질 못해서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결국 그걸 위해 대단히 뭘 더 하거나 할 것..

일상/2020~2022 2021.05.28

건너 들은 이야기

재밌는 얘길 들었다. 기록해두고 싶다. 오랜만에 아는 분을 만났는데, 최근 내 또래 아들을 취직시켜서 마음의 짐을 한시름 더신 분이다. 그 분의 친구분 이야기. 그분은 사업하시느라 바빠서 아들에게 그렇게 크게 신경을 못 쓰고 있었는데, 공부를 하도 안 해서 엄마 속을 썩이는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 아들이 고등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갑자기 집에 안 들어오고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한다. 당황한 이분께서는 경찰에 실종신고를 냈다. 경찰에서는 실종보다는 가출로 보이는데, 혹시 아드님이 여자친구가 있었던 것 아니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분은 전혀 몰라서 "없을 거라고!" 했는데 경찰에서 침착하게 다시 한번 알아보시라고. 그래서 학교에 가서 아들의 친구들을 만나보니, 아니 글쎄, 진짜로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됐..

일상/2020~2022 2021.05.28

아침에 눈을 떴는데

아침에 눈을 떴는데, 가슴에서 사랑이 샘솟아나는 것같은 느낌이었다. 어제 아침 눈을 떴을 때의 그다지 좋지 않았던 기분을 기억하고 있다보니 내 감정기복에 나조차 놀랄 지경이다. 밖에는 비가 꽤 오고 있었다. 그것도 좋았다. 요가를 하고 팔굽혀펴기를 하고 좋아하는 책을 펼쳐 한두 페이지 정도 가볍게 읽었다. 같이 사는 멋있는 남자가 아침밥을 차려줬다. 화룡점정 참기름까지. 이렇게 좋은 아침이 다 있나.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라는 책도 그가 추천하면서 빌려줬다. 제목부터 마음에 든다. 아직 서문을 읽고 있을 뿐이지만. 내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도 아닌데 아프다는 것을 오히려 미안해하게 만드는 사회에 대해 하고싶은 말, 얼마나 많았을까. 잠깐이 아니라 오랜 기간을 어딘가 아픈 채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일상/2020~2022 2021.05.25

에어팟프로를 샀다

에어팟프로를 샀다. 고민은 작년부터 했는데, 이번 고민은 짧았다. 잘 쓰고 있던 헤드폰이 날이 더워지면서 귀에 땀이 차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침 작년 5월부터 5만원씩 부었던 적금 하나가 만기가 됐다. 60만원에 이자 6천몇백원. 애초부터 나의 기쁨을 위해 쓰려고 부은 적금이었으므로 스스로에게 이직 기념 선물을 주기로 했다. 선물을 제외하고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절대로 사지 않는다는 게 내 나름의 생활방식 중 하나다. 그러나 '필요하다'라고 하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 굉장히 모호한 기준이다. 그 기준을 "없어도 죽지 않는다"쪽으로 두게 되면 사실상 살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최근의 나는 기준을 꽤 하향조정한 편이다. 지금의 기준은 "일주일 내로 구체적으로 사용할 일이 ..

일상/2020~2022 2021.05.25

월요일

눈을 떴는데, 도저히 몸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 두 시간을 그렇게 누워있었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건 8시, 거의 지각할 뻔 했다. 그 와중에도 15분요가는 했다. 푸시업은 못해서 집에 돌아와서, 방금, 했다. 그렇게 누워서, 오늘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는 생각을 내내 했는데, 다행히 오늘을 잘 살아냈다. 오늘을 잘 살아내면서, 기분도 훨씬 좋아졌다. 아무에게도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는 주말 이틀이었지만, 오늘은 어쨌거나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그렇게 나눈 별것 아닌 이야기들, 혹은 별것인 이야기들이 좋았다. 아니타 무르자니의 이라는 책도 잠깐 들여다봤다. 출근길에, 그리고 점심시간에 밥 먹고 나서 남은 시간동안. 이 책을 빌려줘서, 같은 저자의 첫 책인..

일상/2020~2022 2021.05.24

하루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알았다. 일단 어제보단 낫다는 걸. 회복됐다, 조금은. 지금은 저녁 6시반. 매일 아침마다 하던 15분 남짓한 요가프로그램을, 방금에서야 했다. 오늘 하루는 말 그대로 흘려보냈지만, 이것마저 하지 않으면 내 일상이 너무 무너질 것 같아서. 인간은 무리 짓는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도 물론 있는 건 알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인 것 같다. 소속감이 함께 가져다주는 어떤 안정감이 내겐 삶의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근데 그게 내 마음대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삶의 시기마다 내가 가장 주요한 소속감을 느끼는 그룹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군생활을 할 때는 아무래도 군대라는 식이다. 대학교 때는 풍물패 동아리가 가장 큰 소속..

일상/2020~2022 2021.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