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392

외면

그가 내 안의 공허를 거울처럼 되비쳐주기 전까지, 나는 내 공허를 철저히 외면하면서, 내가 공허하다는 것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평생 하지도 않다가 한 달 전에 시작한 주식 시세 보는 일을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온갖 단톡방에서 하루에 수백개씩 올라가는 메시지들에 참가하는 일도.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것들이 다 내 안의 공허를 외면하고 시선을 밖으로 돌리는 일들이었다는 걸 문득 알게 됐다. 특히 돈에 대해 생각할 때는 다른 것들에 대한 생각을 현저하게 덜할 수 있다. 왜 사람들이 돈돈돈 하면서 사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얼마를 모으지, 어떻게 모으지, 주식이 오르고 있나 내리고 있나, 뭘 사면 돈을 벌까, 언제 사야할까, 언제 팔아야할까, ..

일상/2020~2022 2021.08.18

잘 살고 싶다

아침에 팔굽혀펴기를 하다가 문득, "잘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음주에 상담 선생님을 만나면 무슨 얘길 하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왜인지 모르게 갑자기 "선생님, 저 진짜 잘 살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내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잘 산다는 게 뭘까, 내가 누군지 알고 싶다. 모호하지만, 그런 느낌이 있었으면 좋겠다. 섹스나 정신없이 분주한 일상이나 웃고 떠드는 시간을 아마 계속 사랑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시간들도 잘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들을 찾아헤매는 데 이제 그리 많지도 않은 소중한 에너지를 그만 쏟아부어도 괜찮은 사람이고 싶다. 정말 좋은 사람과 정말 건강한 관계를 맺고 싶다. 쉽게 끝나지 않는, 언제까지라도 서로에게 귀 기울일 것이라는 믿음이 단단한 바닥처럼 깔려 있는..

일상/2020~2022 2021.08.18

따뜻한 시선

요즘 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무반응은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는다"는 문장이 나왔다.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거의 없는 편이라 동생이랑 얘기할 때면 동생이 항상 답답해하는데, 그런 내게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기억이 하나 있다. 아마 분명 사소한 일이었다고 기억하는데, 내가 비명을 질렀다. 근데 옆방에서 들었을 게 분명한 어머니께서 나타나리라는 내 기대를 깨고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래서 이미 상황은 지나갔지만 더 크게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완전히 무시 당했다. 어른이 되고나서도 가끔 이 기억을 떠올렸지만, '나도 꽤 귀찮은 아이였구나 별것도 아닌 걸로 자꾸 피곤한 어머니를 신경 쓰이게 했으니', 하고 말았다. 다음주 월요일부터 심리상담을 받기로 했다. 그래서인지, 이 기억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결혼생활을..

일상/2020~2022 2021.08.17

존경하는 사람

나름대로 몇 번인가의 연애를 해봤지만, "존경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연애를 시작한 적은 없었다. 이전에 만났던 사람들이 존경할 만한 구석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어쨌든 연애감정과 존경심은 좀 다른 느낌이니까. "존경한다"는 말을 자주 쓰지도 않는다, 그런 마음이 드는 사람은 애초에 주위에 별로 없다. 내가 최근 몇 년 사이 그 말을 가장 자주 쓰는 사람은 내 여동생이다. 가족으로 수십 년을 지켜봐왔는데도 참 바르고, 밝고, 사려깊은 사람이다. 어머니께도 그렇고, 내 입장에선 충분히 흡족하진 않은 본인 남편에게도, 나에겐 조카인 딸 키우는 모습도 그렇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10년쯤 전에, 동생도 결혼하기 전에, "돈은 내가 벌테니, 오빠는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

일상/2020~2022 2021.08.16

달리다

뛰었다. 거리 목표 10km. 6, 7년 전을 생각하고 세운 목표가 너무 높았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나 일단 뛸 수 있을 때까지 뛰어봤다. 5.79km를 뛰고 더 이상 나를 혹사시키지 않기로 했다. 생각따위는 다 날아가버린지 오래. 기분 좋은 탈력감이 남았다. 어제 행복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변을 적을 일이 있었다. 나는 "내일이 기대되는 것"이라고 썼다. 그렇게 썼지만 그렇게 큰 기대하는 일 없었다. 어제 기준으로 내일인 오늘도 휴일이었고 딱히 나쁠 일은 없었으나 딱히 기대할 만한 것도 없었으므로. 그러나 낮잠의 여파와 하루종일 몸은 안 쓰고 머리만 쓰고 있었던 탓에 조금은 가라앉은 마음으로 잠자리에 누워 뒤척이고 있을 때, 내일이라는 선물이 도착했다.

일상/2020~2022 2021.08.15

2주차

회사에서 말복이라고 보내줬던 치킨쿠폰을 썼다. 하루종일 집밖에 나가질 않았더니 소화가 잘 안 되는 느낌이다. 둘이서 후라이드양념반반을 거의 절반 정도밖에 못 먹었다. 데이터 엔지니어링 입문 강의의 2주차 강의를 들었다. 샘플 데이터베이스에서 월별 MAU(Monthly Active Users, 월간 한번 이상 접속한 적이 있는 유저의 수)를 구하라는 숙제가 나왔다. 나도 1년 이상 쇼핑몰의 MySQL 데이터베이스 다루면서 데이터뽑는 건 꽤 익숙해져서 듣자마자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계속되는 에러, 결국 어떻게든 뽑아내긴 했지만 좀 지쳤다. 한번에 너무 많은 것을 배우면 그 의미가 제대로 들어오질 않는 것 같은 느낌이다. 다시 하나씩 차근차근 들여다보고 싶다. 긴 강의를 듣고, 숙제에 매달리며 ..

일상/2020~2022 2021.08.15

미나리간장오일파스타

세상에서 가장 쉬운 기부 [행복두끼챌린지] 나의 한끼 사진을 찍어 올리면 국내 결식우려아동에게 6,000원 상당의 도시락이 전달 된다고 합니다 미나리간장오일파스타 귀촌하고 처음 맞았던 봄, 미나리향이 이렇게 향긋하고 좋았나 생각한 순간이 있었다. 그 뒤로도 미나리를 먹지 않은 것은 아닌데 그 마음은 잊고 있었다. 오늘 채소의계절의 미나리간장을 추천레시피대로 파스타에 얹어먹는데 그 미나리향이 떠올랐다. 오늘은 뭘 먹을까 생각하면 보통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은 사람인데 요즘은 문자메시지에 가득한 반찬과 레시피 목록 덕분에 집에서의 식사가 기대된다. 고맙습니다. 참여방법: SNS에 음식 사진을 올리고, 행복얼라이언스 인스타계정 태그와 함께 #행복두끼챌린지 #행복얼라이언스 해시태그와 친구/지인들을 지목하면 됩니다..

일상/2020~2022 2021.08.14

위로하는 맛

껍질째 끓인 단호박 포타쥬.(채소의계절 반찬구독서비스) 매일 하는 간단한 아침 스트레칭을 마치고 샤워를 하고 냉장고를 열었다. 기대하고 있던 단호박 포타쥬를 꺼내어 꼭 닫힌 뚜껑을 땄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뻥- 소리. 작은 냄비에 절반을 덜고 물을 조금 넣어 약불에서 천천히 저으며 데웠다. 젓다보니 내가 직접 요리한 것이라도 되는 양 정성스러운 마음이 되었다. 사실 나는 "음미한다"라는 동사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성격이 급하다. 지금의 아름다운 장면도 좋지만 그 다음의 전개가 더 궁금하다. 그래서 예전에는 잔잔한 일본영화나 드라마가 몹시 지루하게 느껴졌다. 일상을 살아갈 때도 이 다음에 할 일, 이 다음에 나아갈 단계에 시선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돌아보면 그게 없어졌(다고 생각했)..

일상/2020~2022 2021.08.14

나츠메 우인장을 보다

넷플릭스에 있는 애니메이션 나츠메 우인장을 추천 받아서 보게 됐다. 시즌1의 6~7편 정도를 봤는데, 뭐랄까, 요괴들이 참 인간적이다.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무엇보다 자기들의 이름을 '우인장'에 적어놓고 언제든 부려먹을 수 있는 부하로 만들어버린 레이코에 대해 요괴들이 기억하는 방식은 뭐랄까 아련하달까, 애달프달까. 요괴마다 차이는 있지만 그리워한다는 느낌을 가장 많이 받는다. 외로운 녀석들 같으니. 이름을 가져가놓고 왜 불러주지 않았냐고 하는데 뭔가 참, 그렇네. 이름을 가져갔으면, 불러줬어야 하는 것.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일상/2020~2022 2021.08.11

<불펜의 시간>, 김유원 작가님 인터뷰

청년연대은행 토닥에서 매달 뉴스레터 보내는 일을 맡아서 하고 있다. 이번달의 토기자는 나였다. 예전에 토닥에서 상근으로 일하던 시절, 토닥을 영상으로 찍어 이라는 제목의 다큐영상을 만든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같이 작업했던 감독님께서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소설가로 데뷔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걸 꼭 소개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책을 사서 읽어봤는데 소설도 무척 재밌었다. 소설에 청년연대은행과 비슷한 단체가 슬쩍 등장하기도 하고, 작가님이 문학상 받으시고나서 토닥에 후원까지 해주셨으니 더더욱! 인터뷰를 할까, 그냥 내가 적당히 소개말을 쓸까 고민하다 여쭤봤는데, 고민 끝에 인터뷰를 하시겠다고 하셔서 아주 간단한 인터뷰일 것처럼 얘기해놓고서는 내가 더 진심이 되어서 나름대로 준비를 꽤 했다. 그동안 나왔..

일상/2020~2022 2021.08.08

일상과 창작 사이, 치티 ziti

성북동 주민자치회에서 준비한 2021 주민창작전시회 일상과 창작 사이, "17717"이라는 공간의 지하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짧게 10분에서 15분 정도 잠시 돌아보고 나와서 저녁을 먹으러 갔다. https://www.facebook.com/seongbukdong.council/posts/343976707180839 내가 더 많이 벌고 더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있는데 이런 걸 얻어먹어도 되나라는 죄책감을 아주 조금 느꼈지만, 오늘 나름 고생했으므로 풀코스(나중에 아이스크림까지)로 얻어먹었다. 동네 떠나기 전에 맛있는 거 꼭 사줘야지. https://www.instagram.com/osteria_ziti/

일상/2020~2022 2021.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