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따뜻한 시선

참참. 2021. 8. 17. 22:03

 

 

요즘 <순간의 힘>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무반응은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는다"는 문장이 나왔다.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거의 없는 편이라 동생이랑 얘기할 때면 동생이 항상 답답해하는데, 그런 내게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기억이 하나 있다. 아마 분명 사소한 일이었다고 기억하는데, 내가 비명을 질렀다. 근데 옆방에서 들었을 게 분명한 어머니께서 나타나리라는 내 기대를 깨고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래서 이미 상황은 지나갔지만 더 크게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완전히 무시 당했다. 어른이 되고나서도 가끔 이 기억을 떠올렸지만, '나도 꽤 귀찮은 아이였구나 별것도 아닌 걸로 자꾸 피곤한 어머니를 신경 쓰이게 했으니', 하고 말았다. 다음주 월요일부터 심리상담을 받기로 했다. 그래서인지, 이 기억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결혼생활을 할 때도, 언제부턴가 그는 내 말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처음엔 당연히 못 들은 줄 알고 한번 더 말을 하곤 했다. 근데 못 들은 게 아니었다. 그때의 충격과 상처가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 생각하면, 이혼에 이르게 될 만큼의 어긋남은 분명히 거기서 시작되었다. 그게 다른 남자랑 자고 왔을 때 받았던 충격보다 더 아팠던 것 같다.

오늘은, 최근의 내가 나를 돌보지 않고 있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월에 서울심리지원 동북센터에서 지원받았던 상담이 막 끝날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상담을 좀 더 하고 싶다는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돈을 내고 다른 곳에서 다시 시작해야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벗어났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약 7개월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정말, 많은, 일이. 그리고 나는 또 나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혼 이후 1년 반 남짓한 기간동안 계속해서 깨달았지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실천이 잘 됐던 건 아니다. '나를 사랑해야지'라는 마음 정도로는 너무나 추상적이고 불분명해보이는 이 목표에 다가가지 못했다. 

그 사이에 처음엔 분명히 도움이 됐고, 몇달이나 좋은 감정도 가졌지만, 결국 날 힘들게 만든 관계 속에서 허우적댔고, 새 직장에서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몰라 방황했다. 그 겨울의 상담에서 선생님이 했던 얘기가 떠오른다. "생각이 많은 타입인데, 그 생각을 억누르려고 일상을 다 루틴으로 채워버린 것 같은 느낌"이라고. 난 나름대로 부지런히 살 수 있는 루틴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은근히 뿌듯해하기까지 하고 있던 때였다. 이혼 직전의 우울과 무기력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었기에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셔도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최근의 나는, 내일배움카드로 들은 코딩강의의 프로젝트에서 팀장을 맡았었고, 최근엔 다른 프로젝트에 지원했고, 처음 접하는 분야인 데이터 관련 강의도 토요일마다 하나 듣고 있다. 그 와중에 청년연대은행 토닥 뉴스레터 인터뷰에 열을 올리고, 가계부 커뮤니티에서 저축모임에도 참여하고 있다. 하루를 루틴으로 가득 채웠던 그때가 생각난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만큼 정신없이 나를 바쁘게 만들고 있었던 거 아닐까하는 생각이 이제서야 든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사람이니까 원래 그렇지만, 조금 더 날 지킬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너 그렇지?"라고 했을 때 내가 아니면 부정할 수 있어야하는데, 자꾸만 끌려간다. 물론 인정할 건 인정하는 게 맞지만, 100%진실도 아니고 100%거짓도 아닌 대부분의 얘기에 대해 쉽게 반박할 수 없다. 그래도 나 스스로 적어도 아무였어도 상관없다는 얘기엔,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스스로 납득할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아무나 좋아하진 않는다. 오랜 감정적 습관이 쉽게 없어지지 않아서 잠깐 빠져들더라도 며칠이면 알 수 있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걸러내는 필터는 20대엔 거의 없었는데 최근엔 꽤 촘촘해지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타입의 사람, 나와 잘 맞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제는 나름의 기준이 생겨가는 느낌이다.

사실 나에게 호감을 보이는 사람, 날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 때문에 내가 나에게 호감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것에 대해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아닌 건 아닌 걸 알아가고 있다는 점은 다행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그렇게 끌려가다가 아주 호되게 된통 감정적 타격을 입은 경험들이 있었다.

작년, 올해 그렇게 겪어왔던 일들도 상담 받고 싶고, 그렇게 끌려다니게 만들었던 근본적 원인인 지나친 외로움도 상담받고 싶다. 난 내가 어릴 때부터 그래서 사람들이 얘긴 안해도 다 그렇게 외로운 줄 알았다.(물론 어느 정도는 그렇겠지만) 지금은 내가 유독 그런 면이 있다는 걸 안다. 좀 더 긴 호흡의 상담을 받아보고 싶다고 생각만 해왔는데, 선뜻 선생님을 소개해준, 따뜻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봐준 사람이 있어 그런 기회를 얻게 됐다. 이번 강의까지만 끝나면 당분간은 바쁜 일정은 잡지 않고 요가와 상담과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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