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291

지금이 좋아

회사에서 집을 제공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원래 숙소를 제공하는 회사는 아닌데 여차저차해서 회사에서 월세공과금을 다 내주는 꽤 괜찮은 투룸(본래는 남직원3명이 살던)에 지금 1명이 혼자 살고 있어서, 서울이 본가가 아닌 혼자 사는 남직원이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봤다.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아도 최소 월 30만원을 아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출퇴근 소요시간도 대중교통으로 1시간에서, 걸어서 15분 이하로 꽤 줄어든다. 근데 결과적으로 한참 계산기는 왜 두드렸을까 싶을 정도로 거기 들어갈 맘이 전혀 들지 않았다. 한달에 100만원을 아낄 수 있다해도 난 지금이 좋다.(혹시 월 천만원쯤 준다면 모르겠다) 그 30만원을 악착같이 모아서 하고 싶은 일도 딱히 떠..

일상/2020~2022 2020.06.27

상추 정도야

집 앞에 작은 텃밭이 있다. 대단히 계획적이고 열정적인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몇몇 작물을 심어서 돌보고 있다. 기민이 모종을 사와서 심어둔 상추 셋, 고추 넷, 씨앗으로 심은 쥐눈이콩이 자라고 있고, 얼마 전에 심은 선비콩은 싹이 나길 기다리고 있다. 몇년 전에 심어두었다던 박하는 이젠 완전히 자리를 잡았는지 알아서 잘 자라고 있다. 그 텃밭에서 제일 잘 자라고 있던 상추 하나가 벌레들에게 죄다 갉아먹혔다. 걔들이 잔뜩 붙어서 먹고 있는 걸 봤지만 떼어주지는 않았다. 좀 아깝긴 했지만 세 개 있는 상추 중에 하나만 먹혔을 뿐이다. 나는 그 상추를 못 먹게 돼도 죽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편하게 살겠다고 집 짓고, 도로 깔고 하면서 삶터에서 쫓아낸 다른 종들이 몇인지 셀 수도 없다는 데에 이르면 상추 정도..

일상/2020~2022 2020.06.27

서울을 여행하는 기분으로

이 계절에는 새벽이라고 하기에는 온 세상이 너무 밝은 아침 6시, 한강을 따라 자전거를 탔다. 그러고 있으면 출근하는 직장인이 아니라 꼭 서울에 여행 온 사람이 된 것만 같다. 한강의 북쪽 강변을 따라서 직장이 있는 송파를 향해 동쪽으로 페달을 밟으며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반짝이는 물과 남쪽 강변을 바라봤다. 먼 나라의 도시에서 느끼던 낯설고 설레는 기분을 떠올렸다. 옆으로 지나치는 일찍부터 운동하러 나오는 사람들도 낯설게 바라봤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을 보는 기분으로(사실 그렇기도 하고). 그렇게 바라본 서울은 내 머릿속에 들어있던 이미지에 비해 푸르른 느낌이었다. 다른 나라에 살던 사람들이 서울에 여행 와서 서울을 바라보면 이런 기분일까. 혼자 여행을 하고 돌아올 때면 일상도 여..

일상/2020~2022 2020.06.23

생일

오늘은 내 생일. 세상에 나와 서른 번째 맞는 생일이다. 만 30세가 됐다. 이제 어떤 셈법으로 따져도 20대라고 우길 수 없는, 빼도박도 못하는 리얼 30대에 진입했다. 다행하게도 지금의 내가, 그리고 지금의 삶이 꽤 맘에 든다. 맛있는 소고기와, 살면서 먹어본 가장 비싼 와인과, 기민이 성북동 디저트작업실에서 미리 주문해둔 메론케익을 먹었다. 위버가 미역국도 끓여줬다. 한국 나이로 서른 살이 되던 1월 1일 새벽에는 치앙마이에서 방콕으로 올라가는 버스에 타고 있었다. 어둠컴컴한 창밖을 내다보며 이 버스가 방콕으로 간다곤 하는데 사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는 것처럼, 내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는 기분이었다. 내가 어쩌다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까 싶었다. 물론 지금도 내 삶이 앞..

일상/2020~2022 2020.06.23

6월 14일 일기

어제는 M과 두 시간동안 산을 탔다. 오전 7시40분에 출발했는데 이미 대낮같은 뜨거움이 우릴 반겼다. 땀을 뻘뻘 흘리며 집에 왔을 때 아직 오전 10시도 안 된 시간이었다. 걷는다는 행위에는 어떤 마력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순례길같은 걸 걷겠지. 나 빼고 같이 사는 사람 둘이 모두 산티아고 순례길 경험자들이다. 걷다보면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나도 모르게 정리가 된다. 그리고 계속 걷다보면 결국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때가 오겠지. 기회가 닿는다면 한번쯤 걸어보고 싶다. 그렇게 긴 시간 혼자 걷는다면 내 모든 기억을 돌이켜보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하는 상상을 한다. 빨래를 해서 널고 청소를 하고 텃밭에 풀도 좀 매고, 책을 펴놓고선 낮잠을 한숨 자고 슬기로운의사생활OST를 ..

일상/2020~2022 2020.06.23

점점 더 살고 싶어지는 나날

점점 더 살고 싶어지는 나날.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나날들. 나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과거가 가리키는대로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내가 새로운 마음에, 새로운 삶에 다다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지금 여기에서 마음이 가는대로. 분명히 그렇게 살고자 했는데 언제부터 잊어버렸을까. 나를 사랑하는 법, 삶을 사랑하는 법을 조금씩,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삶이 내게 준 것들과 줄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_페이스북 6월 13일

일상/2020~2022 2020.06.23

취미

최근에 내 취미가 뭔지 생각해봤다. 늘 그렇듯이 게임, 독서 정도가 가장 오랫동안 해온 취미생활이었는데, 거기에 연애를 넣어야한다는 자각이 들었다. 제대로 된 연애를 처음 해본 건 스물한 살 때였는데, 군대에서 헤어지고 스물셋에 전역한 이후로 결혼하기 전까지 연애를 쉰 적이 거의 없었다. 잘생긴 것도 아니고 가진 것도 없는데, 진짜 열심히 했다.(도대체 그땐 어떻게 그게 가능했지!?) 결혼하고 나서 난 왜 하고싶은 게 없지? 왜 취미가 없지?라고 생각했을 땐 답을 못 찾았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연애가 내 주요한 취미생활 중 하나였던 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취미를 정의내리기야 어렵지만 돈 버는 일이 아니면서 내 시간과 노력과 애정을 쏟아서 즐기는 일이라고 하면, 나에게 있어서 연애는 그 조건에 부합..

일상/2020~2022 2020.06.10

야근보단 퇴근

아침을 먹으면서 어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풀었다. 혼자 그래놀라에 아몬드유 부어 먹으면서 머릿속으로 '아, 그 조건을 거기에다 걸면 되잖아? 아! 그럼 이건 어떡하지, 아 그 조건문에다가 OR로 이걸 넣고 AND로 저거 넣으면 되는 거 아니야?' 혼자 이러고 있다. ㅋㅋ 역시 야근보단 퇴근이다. 어제 6시 10분에 우리 층에서 1등으로 퇴근했는데, 거기서 머리 싸매고 끙끙대고 2시간 정도 야근했으면 풀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냥 집에 와서 푹 쉬고 아침에 일어나니까 나도 모르게 그 생각을 하고 있다. 야근하면서 안 돌아가는 머리 붙잡고 억지로 하는 것보다 피곤하지도 않고 기분도 훨씬 좋고.ㅎㅎ 어제는 팀장님이 무슨 일하고 있냐고 물어봐서 대답했더니만 그런 사소한 일 말고(사소함의 기준은 그 문제에서 왔다갔..

일상/2020~2022 2020.06.10

나이

내가 예전과는 다르다고 느낄 때, 그걸 나이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걸 정말 싫어하는데, 나이를 먹었구나라고 느끼는 순간이 없는 건 아니다. 주로 기존의 경험 때문에 내가 전보다 더 망설일 때가 그런 순간이다. 과거를 기억하고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건 내게 무척 중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지금 하고 있는 혹은 하려고 하는 경험을 과거의 어떤 비슷해보이는 경험의 카테고리에다 비추어보고는 지레 겁을 먹거나 망설이게 되는 때가 있다.(사실 냉정하게 돌아보면 경험이 없을 땐 또 경험이 없으니까 두렵고 망설여졌을 텐데) 그게 때론 아쉽다. 왜냐면 분명히 그 경험에는, 힘들고 나쁜 점만 있진 않았던 경우도 많은데 기억이 결과적으로 나빴다, 마지막에 힘들었다, 는 부분만으로 편집되어있어서 그걸 피하게 되기 때문이다...

일상/2020~2022 2020.06.04

설렘

요즘 몹시 설레는 일이 생겼다. 달달한 연애 웹툰을 재밌게 보고서는, 외롭다고 페이스북에 썼더니 밥 같이 먹는 친구하라며 소개를 시켜주셨다. 일요일에 카톡 프로필을 받고 화요일 저녁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러고선 어찌나 설레던지. 특히 당일이었던 화요일엔 하루종일 허둥댔다. 그런 내 모습을 스스로 지켜보면서도 웃겼을 정도로. 샤워하려고 안경 벗다가 코받침을 부러뜨려먹고서는(그래서 몇 년 전에 쓰던 검은 뿔테안경 겨우 찾아내서 그거 쓰고 출근하고) 안경아, 너까지 긴장했니? 하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밥 먹다가 자꾸만 젓가락질 이상하게 해서 뭐가 막 튀고, 걷다가 발 헛디디고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하던 습관적인 행동들이 다 뭔가 어색한 느낌이었달까? 나 왜 이렇게까지 긴장하고 있지, 할 ..

일상/2020~2022 2020.06.04

산행

지난 토요일, 오랜만에 산에 갔다. 산에 갔다라고 말하기엔 민망한 동네 뒷산 산책 정도이긴 했지만. 내가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만날 사람도 업속 할 일도 없다고 우울해하는 게 마음이 쓰였는지, 하우스메이트가 같이 가자고 했다. 자전거도 날이 더워졌고 비도 자주 내렸고 집 근처 따릉이 대여소에 자전거도 없다는 이유로 한동안 못 타다가 지난 목, 금요일에 타고 출근했다. 몸을 더 움직이니까 확실히 좀 낫긴 하다. 모든 면에서. 내 몸과 뇌는 자꾸만 익숙한 우울감을 느끼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새 우울 중독이 됐나보다. 우울증 초기 증세라고도 볼 수 있을 만한 기분과 증상이 찾아왔다 멀어졌다를 반복하고 있다. 중독된 걸 끊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계속해서 의식하고 있다. 바디로직을 샀다. 자세를 교..

일상/2020~2022 2020.05.25

나는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나

'목표'에 대해 생각한다. 이젠 아무도, 내 삶에 나를 방해할 사람은 남아있지 않다. 내가 어떻게 산다고 해도, 걱정은 해줄지언정 뜯어말릴 사람도 없다. 이 자유로운 삶을, 이제 온전히 내게 달린 삶을, 나는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고 있나? 더 이상 내 일상이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닐 때, 누구도 탓할 사람이 없다. 오직 나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고 느낀다. 이 자유 앞에 설레고 두렵다. 내가 나를, 잘 돌봤으면 좋겠는데. 내가 나를, 더 내가 원하는 곳을 찾아 잘 데려갔으면 좋겠는데. 나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나, 나는 나에게 얼마나 친절한 사람인가.

일상/2020~2022 2020.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