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3~

새해에 읽은 책

참참. 2025. 1. 11. 21:52

 

 

25년 상반기에는 연인이 작년에 읽은 책 중 최고로 꼽은 책들 중에 내가 읽지 않은 책들을 읽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게 계기가 되어서인지 한동안 덜 읽던 책을 꽤나 꾸준히 읽었다.

출퇴근길에는 주로 회사 일에 필요한 기술서적(블라디미르 코리코프, <단위테스트>)을 읽었지만, 퇴근 후와 주말을 이용해 벌써 네 권의 책을 읽었다.

수미, <우울한 엄마들의 살롱>
김정운, <에디톨로지>
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남유하,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

우울한 엄마들의 살롱을 읽으면서는 육아의 힘듦이 정말 격하게 전해져왔다. 무엇보다도 내가 내 삶, 내 일상에 대한 통제력을 갖고 있지 못한 것 같다는 그 감각이 가장 공감됐다. 나도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정말 힘들었다. 삶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얼마나 있겠냐만은 그래도 내가 내 삶을 어느 정도 내 의지로 꾸려나가고 있다라는 감각이 있는 것과 전혀 통제력이 없고 끌려다니듯이 사는 것은 동일해보이는 상황이어도 전혀 삶의 질이 다르다.

뿐만 아니라 벌써 세세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역시나 경험해보지 못해서 전혀 몰랐던 새로운 육아의 어려움들도 생생하게 전해져왔다. 읽으면서 아무래도 (특히 한국사회에서) 아이를 낳는 건 아무래도 역시 곤란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도 추천하는 쪽 입장도 있으니까, 그 다음 읽을 책은 정지우 작가님의 <그럼에도 육아>다.

<에디톨로지>는 24년 연말에 마지막으로 읽은 책 <에디토리얼 씽킹>(최혜진)에서 언급되기도 했고, 전에 김정운 작가님의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읽어봤다. 최근에 출간된 책도 있었는데 도서관에서 인기가 많은지 전부 대출중이어서 우선 예전에 내신 <에디톨로지>를 빌렸다. 최근에 유튜브 채널 지식인사이드 인터뷰도 몹시 재밌게 봤는데 최근의 핫한 AI 툴들을 개발자인 나보다도 더 발빠르게 써보시고 공부하신 점이 인상깊었다. 책은 거의 10년 전에 출간됐는데 위 유튜브 인터뷰와 겹치는 내용도 좀 있는데 좋다. (유튜브 영상도 "죽을 때까지 집 평수만 늘리는 한국 사회의 최후"라는 문구에 어그로 끌려서 봤다.)

<에디토리얼 씽킹>와 <에디톨로지>에서 좋았던 점은 창조라든가 창의적이라는 게 완전히 아무도 본 적 없는 걸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다르게 편집하는 기술이라는 것, 그리고 그걸 삶에 적용해서 내가 내 삶, 내 일상, 소유, 행동, 가치 등을 스스로 편집할 수 있다는 얘기를 설득력 있게 한다는 점이었다. 내가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이, 내가 내 과거, 내 선택과 행동들 특히 내가 후회하고 스스로 비난하고 자책했던 그것들을 다른 관점에서 보고 다른 서사를 만들어줌으로써 내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자아상이 바뀐다는 점이었는데 그게 두 책의 "편집"에 대한 통찰들과 연결됐다.

지난 20년간 에디터로 일하며 얻은 가장 소중한 삶의 자산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의미의 최종 편집권이 나에게 있다'는 감각이다. <에디토리얼 씽킹>
'내가 이야기하는 나'가 바로 '나'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아이덴티티identity, 즉 자기 정체성이라고 정의한다. 내가 이야기하는 나를 자기 자신으로 동일시identify하는 과정에서 자아가 구성된다는 거다. <에디톨로지>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연인이 정말 좋아하는 소설이다. 나는 스토리 전개가 느린 소설을 선호하지 않아서 초반부에는 좀 답답한 부분이 있었다. 그래도 풍경이나 건물 묘사가 찬찬히 읽어보면 눈으로 보듯이 그려져서 좋았다. 실존했던 건축가들이나 유명한 건물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데 찾아서 사진을 보거나 하는 재미가 있었다. 등장인물들이 잘 머릿속에 안들어와서 한번 이름을 종이에 주욱 적어놓으니까 훨씬 더 좋았다. 후반부로 갈수록 나름 굵직한 사건들도 생기고 인물들 간의 대화나 상호작용도 많아져서 읽는 재미가 더 있었다. 소설에서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유명건축가 무라이 슌스케가 젊은 화자에게 이야기해주는 조언이 인상깊었다.

"불합리한 것이나 억지 등 여러 가지 일에 정면으로 부딪쳐야만 할 때가 있지. 그것이 건축가의 일이야"
...(중략)
"그런 일을 되풀이하고 있는 동안에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하고 싶지 않은지, 점차 모르게 돼. 알겠나?"
"네"
"말도 안 되는 것에 밀릴 때도 있겠지. 상대방이 있는 일이니까. 다만 마지막에는 밀린다 해도 자기 생각은 말로 최선을 다해 전달해야 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생각하는 건축이 아무 데에도 없게 돼. 자기 생각을 자기 자신조차 더듬어갈 수 없게 된다고."

끝까지 내 고집만 피우라는 게 아니라, 어차피 안 될 거라는 지레짐작으로 내 의견, 내 생각, 내 감각, 내 취향을 얘기해보지도 않고 없애다보면 정말 내 생각이 없어지고 갑자기 내 취향을 찾아보려해도 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나는 왜 이렇게 취향이 분명하지 않을까를 고민하던 시기에 했던 생각과 비슷해서 공감이 많이 됐다.

오늘은 딸이 엄마의 스위스 조력사망(안락사) 동행기를 쓴 에세이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를 읽었다. 보관할 곳이 부족하다보니 요즘은 꼭 소장하고 싶은 책이 아니면 도서관에서 빌려읽는 편인데 꽤 오랜만에 읽어보기도 전에 돈 주고 산 책이다. 신간이라 도서관에 아직 없기도 했고 빨리 읽어보고 싶었다. 아마 분명 좋을 거라는 느낌도 있었다. 우리 사회에 더 많이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도 했고. 그리고 이런 높았던 기대치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좋았다. 읽으면서 몇번이나 눈물이 났다.

죽음에 대한 경험이 살아있음을 강렬하게 느끼게 한다. 저녁 먹고나서는 다큐멘터리 <<엔딩노트>>도 봤다. 10년도 더 된 일본작품인데, 딸이 아빠의 암투병과 죽음까지를 찍어서 엮은 작품이다. 남겨진 이들의 슬픔은 크지만, 오히려 그렇다는 사실까지 포함해서 두 작품의 돌아가신 분들은 참 좋은 삶을 사신 것 아닐까, 그런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와의 헤어짐이 힘들다는 건 그 사람이 그만큼 내 삶에 큰 의미를 주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을 잃었을 때, 다시는 볼 수 없게 됐을 때 내가 살아가는 의미가 흔들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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