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3~

잘하고 싶은 게 있으면

참참. 2024. 7. 7. 17:06

 

한달 넘게 열심히 하던 게임(피크민 블룸)을 어제 삭제했다. 너무 열심히 해서 문제가 됐다. 연인이 지적한대로 주의가 그쪽으로 많이 쏠려있었고, 게임 특성상 산책이나 이동할 때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서 함께하는 산책에서도 나누는 대화나 산책하는 마음이 좀 달라졌었다. 혼자 달리면서도 한번씩 속도를 늦추고 핸드폰을 들여다보게 됐고, 머릿속에 게임 생각이 많았다. 오늘 오랜만에 핸드폰없이 워치(가민)만 차고 달리기를 했더니 이런저런 삶에 대한 생각, 읽고 있는 책에 나온 구절같은 것도 생각해보게 되고 좀 아무 생각없이 지나치는 풍경을 볼 시간도 있어서 좋았다. 2시간 남짓한 디지털디톡스의 시간이었다.

굉장히 인상깊게 읽었던 제현주 작가님의 <일하는 마음>이 5주년 개정판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한동안 궁금해하다 결국 샀다. 추가된 서문을 읽고, 3분의 1 정도 읽다가 뒤에 있는 개정판에서 추가된 7장으로 넘어가서 거길 먼저 읽고 다시 읽던 곳으로 돌아와서 마저 읽었다. 다시 읽어도 여전히 좋았고, 추가된 글들도 좋았다. 책을 읽으며 추가된 서문에 나온 영화 <풀 서클>도 봤고, 책 중간에 언급되는 피아니스트 시모어 번스타인 영화도 봤다. 일과 일상, 일과 삶을 어떤 관계로 둘 것인가,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할 수 있어 좋았다.

어제 산책하면서 연인에게 요즘의 일상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게임에 대한 이야기에서 이어졌다. 질문을 받기 전까지 내가 요즘 어떤가, 좀 피곤하다는 것 외에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말을 하다보니 재미가 없다는 얘기가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것이 게임을 더 열심히 했던 이유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 왜 재미가 없을까? 어떻게 하면 재밌어질까? 거기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답을 찾지 못했다. 일단은 좀 쉬어야할 것 같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너무 지친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서인지 <일하는 마음>에서 지난번에 읽을 때는 이 정도로 눈에 띄지는 않았던 문장이 이번엔 크게 다가왔다. 

"넌 사는 게 괜찮아?" 하고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흐, 픽, 흥, 허, 풉을 뒤섞은 외마디의 감탄사를 내뱉고는 5초쯤 후에 "잘하고 싶은 게 있으면 괜찮은 것 같아"라는 대답인지 대답이 아닌지 모를 말을 하더니 "사니까 사는 거지, 가 아니게 만드는 건 그런 일이야" 하고 덧붙인다.

정말 그런 것 같다, 내가 요즘 잘하고 싶은 건 뭘까, 게임도 잘하고 싶었나보다, 근데 그 게임을 잘해서 더 열심히 해서 무엇을 얻는가에 대해 나 스스로도 이미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근데 왜일까, 왜 잘하고 싶은 게 있으면 괜찮은 걸까, 잘하고 싶은 게 있어야만 삶이 괜찮다는 게 괜찮은 건가, 그런 생각을 이어가면서 불광천을 걷는데 오리 다섯 마리가 유유히 물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물론 물 속에서 발은 젓고 있지만 그것까지도 여유로워보였다. 여유롭다라는 감상 자체도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일 뿐 오리는 실제로 어떻게 느낄지 알 수 없다, 그런 생각도 하고, 지금은 그냥 여유를 즐기는 걸까 아니면 먹이를 찾고 있는 걸까, 오리도 잘하고 싶은 게 있을까, 로 이어졌다. 사실 그냥 행복하게 잘 살고 싶을 뿐인데, 충분히 잘 살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한번씩 잘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연인과 2024년 상반기를 돌아보고 하반기에 하고 싶은 일로 이루어진 빙고를 만들었는데, 그러고보니 여기서도 많은 부분이 잘하고 싶은 것과 관련있다. 요즘 주로 사용하고 있는 개발언어인 Typescript를 공부하겠다, 달리기 최고기록을 경신하겠다, 요가 머리서기 자세를 완성하겠다, 같은 것들이다. 확실히 '나아간다', '나아진다'는 느낌은 일상에서 아주 소중한 것이다. 그게 꼭 객관적인 지표같은 걸로 표현될 필요는 없다. 뭐가 됐든 내가 나아지고 있다고 "스스로 느끼는" 게 핵심이다. <일하는 마음>에서 말씀하신 스키를 탈 때의 마음같은 것. 요즘 내가 그런 게 별로 없는 것 같긴 하다.

 

'일상 > 2023~'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인드셋  (0) 2024.07.30
친구의 출국 기념 독주회에 다녀와서  (1) 2024.06.16
새 삶  (0) 2024.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