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3~

2023년 마지막날

참참. 2024. 1. 1. 10:09

2023년 마지막날 개인회생 종료가 1월 5일인데 1500만원이 부족해서 빚 1억2천이 부활하게 생겼으니 돈을 빌려달라는 카톡이 도착했다. 어머니로부터.

2020년 1월에 딱 1000만원 갖고 이혼하고 서울로 혼자 이사 나왔다. 이사비용이랑 첫 달 월세 내고 나니 900만원 남짓 남았었다. 그나마도 보증금을 안 내도 되도록 배려해준 셰어하우스가 있어서 가능했다. 마침 집 근처 다이소에서 새벽알바를 구하고 있었다. 하루 3시간, 주 6일. 알바하며 지원한 각종 시민단체에서 서류 탈락하고 시에서 운영하는 공간의 공간 지키미 1년 계약직 자리에도 결국 떨어졌다. 와중에 코로나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붙기도 힘든데 생각하면 할수록 더이상 하고 싶은 일도 아닌 시민단체나 사회적인 일 카테고리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래도 정말 운 좋게 한 중소기업에서 개발자로 새로운 커리어를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시작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배운 것도 별로 없는 상태에서 채용된 만큼 첫 계약연봉은 2500도 안됐다. 이제 그로부터 4년 남짓 됐다. 모아봤자 얼마나 모았을까. 이만큼 모은 것도 스스로 대단하고 대견하다 생각한다. 올 여름 집 사면서 그나마 있던 주택청약이며 적금이며 다 깨서 넣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여친의 부모님과 언니한테까지 돈을 빌리면서도 깨지 않고 2년을 채워 모은 청년희망적금 1200이 2월 만기다. 지금 주택담보대출을 매월 155만원씩 갚고 있다. 나이가 30년이 넘어가고 있는 빌라이니만큼 집 여기저기 고치고 싶은 데가 많다. 겨울이 오니 결로가 심해 고생 중이다. 그 1200이면 주택담보대출 매달 납입하는 원금이자를 좀 줄일 수도 있고 집 고치는 데 쓸 수도 있을텐데, 아깝고 답답하고 화가 난다.

나는 어머니가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나쁜 사람이 전혀 아니며, 나름의 최선을 다해 평생 고생하며 살아오셨음을 알고 있다. 빚의 적지 않은 부분은 돌아가신 아버지와 살아계신 외삼촌들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어머니의 삶이 아마 나보다 더 고되고 힘들었으리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로부터 받는 피해와 상처가 없는 일이 될 수 없다.

무엇이 가족을 가족으로 만들까? 적어도 내게는 혈연과 DNA보다는 함께 나눈 시간과 기억이 훨씬 의미있다. 좋은 관계란 함께해서 즐겁거나 서로에게 도움이나 의지가 된다거나 그런 것들이 있는 관계일 것이다. 나를 낳은 사람이라고해도 당연히 나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할 수 있다.

아쉽게도 내게 어머니는 보고싶은 사람도 애틋한 사람도 함께 있으면 즐겁거나 솔직하게 고민을 나누거나 의지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좋은 관계라고 볼 만한 어떤 요소도 갖추지 않았다. 공유하는 기억도 거의 없다. 15년 이상 한 집에 거주했고 평생동안 모자관계를 맺어왔지만 대화를 통해 서로의 장기기억 속에 의미있는 수준의 공통의 기억을 새겨넣는 데 실패했다. 이렇다할 공감대도 별로 없다. 즉, 만나도 할 얘기가 없다. 그게 그의 탓이라는 건 아니다. 그냥 우리는 살다보니 그렇게 됐다.

이렇게 또 돈 얘기를 하는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고 미안했을까. 우리가 좀 더 친하거나 서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사이였다면 1500만원 마감 6일 전이 아니라 2년은 더 전부터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을텐데.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이라는 그의 말이 진짜일지 나름대로 가늠이라도 해볼 수 있었을텐데. 나에겐 그의 뒤늦은 상황설명을 믿을 근거도 감정도 없다. 내가 한마디 더 물을 때마다 드러나는 또 다른 빚. 과연 그게 정말 다일까? 이번에는? 지금은 그게 다라도 앞으로 더 추가될 일은 없을까? 어쩌면 그냥 그 빚이 부활하든말든 더이상 내 돈을 섞지말고 결국 파산하거나 사망한 뒤 상속포기를 선택하는 게 더 나은 길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와 나 사이에는 동생도 있고, 이번에야말로 정말 마지막이라는 것을 적어도 동생은 믿고 있고, 나도 그에게 어쨌든 받은 것들이 있으니 남은 평생동안 드릴 용돈을 일시불로 가불해서 드린다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앞으로 그 어떤 사정이 또 닥쳐오더라도 나에게는 이것이 정말 마지막일 것이다. 나에게는 지켜야할 내 삶과 내 가족이 있으므로.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그에게도 좋은 일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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