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3~

생존감정

참참. 2024. 2. 12. 05:39

 

 

이번 설에는 고향에 가지 않았다. 어머니도 보지 않았다.

지금 그 누구보다 보기 싫은 사람이 어머니다.

1500만원, 감당할 수 있는 돈이라고 생각했는데, 주고 잊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한달 반이 지났지만 괜찮아지긴커녕 내가 그 일 때문에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만 해도 다행일 지경이다.

 

화가 난다.

사실상 강도를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평생 한번에 그런 돈을 써본 적도, 쓸 것이라고 상상해본 적도 없는 1500만원을 쓰고 내가 얻은 것은 분노와 좌절감뿐이니까.

 

그게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여유자금의 전부에 해당했기 때문에,

내가 갖고 있던 얼마간의 안정감도 같이 사라졌다.

500만원이라도 쓸 일이 생기면 또 빚을 내는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이미 빚을 1억 4천만원이나 갖고 있는데도.

 

그래서 그동안 불안하고 무기력했다. 초조하고 여유가 없었다.

조 디스펜자 책의 번역본에서 소위 생존 감정이라고 하는 상태에 놓여있었다.

스트레스를 받는 이때의 인간은 "투쟁 혹은 도주 모드"(fight-or-flight mode)다.

안타깝게도 현대사회의 이 상황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상태다. 어머니와 맞서싸운다고 1500만원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이 상황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다.

 

이 상태의 나는 전형적인 반응을 보인다.

1. 돈과 물질적인 것에 집착한다. 돈을 쓴다는 결정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2. 현재의 상황과 감정으로부터 그것들을 마주하지 않고 도망치려 한다. (모든 SNS플랫폼에서 제공하는 짧고 자극적인 도파민반응을 유도하는 영상들이 이를 도와준다.)
3. 더 정신없이 뭔가를 배우거나 성취하거나 어딘가에 빠져들려고 한다.
4.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어지고 불확실함을 견디기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너그럽지 못하다.
5. 장기적으로 넓게 볼 수 있는 능력이 줄어들고, 단기적이고 단편적인 것들에 사로잡힌다.
6. 우울감과 무기력감, 아무것도 하고싶은 게 없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원인을 알아내는 것은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나마 이렇게 알게 된 것도 연인과의 대화, 특히 그의 본질을 꿰뚫는 질문 덕분이다. 머릿속을 맴돌고만 있거나 어렴풋하게만 인지하고 있던 것들이 대화를 통해 바깥으로 꺼내어지고, 더 쉽게 바라볼 수 있게 되어 명확해진다.

내가 돈 때문에 스트레스 받기 시작하면 애꿎은 그에게 화살이 돌아가기 쉽다. 지금 같이 살며 경제를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제는 그에게 짜증이 났고 짜증을 냈다. 짜증이 난 진짜 원인을 찾다보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의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 너무 미안하다.

 

원인을 찾고나니 생각이 많이 정리가 된다. 내가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현 상황에 대한 다른 논리와 해석들이 떠오른다.

1. 연인이 쓰는 돈은 거의 대부분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2. 우리가 함께하는 삶이 행복한 이유 중 하나는 내가 미처 챙기지 못하고 써야할 곳에 못 쓰는 것들을 그가 해주는 덕분이다.
3. 나는 여전히 내 시간과 내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 내가 결정할 수 있고, 내가 결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4. 1500만원은 큰 돈이지만 내가 무사히 태어나 이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에 어머니가 기여한 바를 따지자면 적은 돈이다.
5. 1500만원은 당장은 꽤 큰 돈이었지만 인생을 더 길게 보면,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는 인생이 망가질 정도로 큰 돈은 절대 아니다.
6. 이제 내겐 1500만원의 현금보다 더 든든한 가족들이 있다.

 

그래도 그 분노의 덕으로 정말 가고 싶은 회사에 낼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써서 냈다. 비록 서류에서 떨어졌지만.

나를 살리기 위해 달리기를 하고 요가를 나가고 (잘 되진 않았지만) 명상도 몇번 시도했다. 애 쓴 나를 칭찬한다.

무기력해도 함께 산책을 나가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도 놓지 않았다. 춤을 췄다. 책을 읽었다. 고생했다.

 

이 생각들을 다 꺼내놓고 나니 다시 잘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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