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걸음이 느려졌다

참참. 2021. 8. 19. 09:45

 

어제 마음속으로 12시까지만 하자고 한 일이, 결국 1시 가까이 되어서야 끝났다. 끝나자마자 바로 잠을 청했다. 오늘을, 그리고 오늘 아침의 요가 수업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시계가 다섯시 반을 지나갈 즈음 몸을 일으켰다. 제일 먼저 한 일은 단호박포타쥬를 데우는 일이었다. 다섯시 반이라고 해도, 실은 마음이 꽤 조급했다. 샤워도 해야하고 요가수업하는 곳까지 가야하니까. 이동하는 시간만 해도 넉넉히 사십오분이 필요하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럴 때 시리얼을 후닥닥 해치웠다. 아마 3분쯤 걸렸을 것 같다. 좋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포타쥬를 나도 모르게 접시에 담고 보니, 나는 이걸 전자레인지에 돌리려고 한 건가, 아니면 차가운 채로 먹으려고 한 건가. 스스로에게 그렇게 묻고는 어쩐지 둘 다 싫어져서 냄비에 다시 옮겨부었다. 불을 약하게 조절하고 천천히 저으며 데웠다. 점점 진정이 됐다. 두 숟갈 즈음 먹고나서, 이전에 받았던 문자를 다시 꺼내보았다. 그 설명을 읽고나서 먹으면 그 설명에 나와있는 재료들과 맛들이 더 잘 느껴진다. 그 기분이 참 좋다. 한 숟갈, 한 숟갈 따뜻한 포타쥬가 몸과 마음을 데워가는 느낌을 음미했다.

어떻게 그렇게 대충 살면서, 그럭저럭 괜찮게 지내고 있다고 믿었던 걸까. 괜찮은 일상, 아니었으면서. 그리고 살면 살수록 몸의 존재를 너무 간과해왔다는 생각이 점점 더 커져간다. 내 몸이 절대 내 전부는 아닐지라도, 내 영혼의 집, 가장 가까운 친구, 평생 조심스럽게 돌보아야할 소중한 것이며 나의 아주 큰 부분이라는 걸. 요가를 만나서 다행이다.

버스를 타러 가면서도 조급하게 뛰거나 안달복달하지 않았다. 전같으면 1분이라도 수업시작 전에 도착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기세로 뛰었을 텐데, 어쩐지 오늘은, 모두를 위해 최선을 다해 시간에 맞추겠지만 조금 늦는다고 하더라도 몸과 마음에 무리를 주고 싶지 않았다. 몸과 마음의 평화를 위해 하는 요가인데 그 요가에 늦을까봐 걱정하는 것으로 나를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버스에 몸을 싣고 가만히 눈을 감고 호흡에 마음을 두었다. 도착할 즈음엔 부족한 잠으로 처지던 몸이 조금 더 가벼워졌다.

요가를 하고나면 언제나 그렇듯, 오늘도 개운한 마음으로 걸었다. 뜨거운 볕을 우산으로 가리고, 어쩐지 힘이 빠진 발걸음으로. 평소보다 조금 걷는 속도가 느리다는 걸 느끼면서, 하늘도 보고 어쩐지 옆도 슬쩍 둘러보면서 걷게 됐다. 걷고 있는 그 순간과 지금 보이는 하늘의 아름다움을 가만히 느껴보면서 잔잔히 걸었다. 

건강한 사람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건강한 에너지가 전해져온다. 그 에너지 때문에 나도 조금씩 변화한다. 당연히, 좋은 사람들 곁에 있는 게 좋다는 건 뻔한 사실이지만, 이렇게나 피부에 닿게 느껴본 적이 있나싶다.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는 편인 나라서 그동안 다양하게 만나봐야지하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한편으로는 관계를 함부로 맺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 관계로부터 영향받게 되니까.

어쩌면 그 관계들을 끊으려고 귀촌까지 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그만 좋은 영향을 주는 관계까지 다 멀어져버리고 말았지만. 이혼하고 서울로 돌아와서, 우습지만 관계 맺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시 거듭 깨닫고 있다. 많은 걸 배웠으니 나아졌을 줄 알았는데, 관계는 항상 다르고 항상 어렵다. 어렵지만 핵심은 그 사람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라는 걸 안다. 알긴 아는데, 그렇게 느끼고도, 알고 있는데도 나를 제대로 보지 않고 있었다. 지금도 어떻게 해야 나를 잘 볼 수 있는건지 사실 잘은 모르겠다. 눈에 보지도 않고, 수치로 나타나지도 않아서, 그런 것들은 어떻게 알아야하는지 모르겠다는 마음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더 관계가 소중하다. 요즘 가장 자주 대화를 나누는 얼마 안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그냥 기적 같다.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아마도, 흔들리고 흔들리면서도 결국은 맞는 방향으로 이끌려가고 있는 거 아닐까 싶은 안도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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