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렸다. 미술치료하시는 분이 와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어떤 프로그램인지는 모르는 채로 참석했다. 근데 문제는 그림을 그리는데 옆 사람의 얼굴을 그리라는 것이었다. 투명한 필름을 모델이 되는 사람이 붙잡고 있고 그 위에다 그리는 식이었다. 잊고 싶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미술시간, 3년동안 단 한 학기 포함되어있던 미술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친구들끼리 짝을 지어 캐리커쳐를 그려야 했다. 사진을 보고 캔버스에 유화를 그리는 건 그래도 괜찮았는데, 친구의 얼굴을 그리라는 건 내겐 너무 어려운 주문이었다. 사실적으로 그릴 필요 없고 ‘특징만 따서 간단하게’ 그리면 된다는 말은 통역도 불가능한 외계어에 불과했다.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중에 공 던지는 법을 잊어버린 야구선수가 나온다. 숨쉬듯이 자연스럽게 공을 주고받던 그 선수는 어느날 갑자기 ‘내가 원하는 저 곳으로 공을 던지려면 어떻게 했었지? 어깨를, 팔꿈치를, 손목을 어떤 각도로 움직였었지?’ 라는 식의 의문을 갖게 되고, 그 의문이 떠오르는 순간부터 갑자기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지면서 원하는 곳으로 공을 던지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공을 특정한 곳으로 던지는 건 그 곳을 보면서 저기로 던져야지하고 던지면 몸이 알아서 그렇게 던져주는 것. 우리가 숨쉬는 법을 익혀서 숨을 쉬는 게 아니듯이, 위액을 분비하고 음식물을 식도에서 위로, 위에서 장으로 보내는 일들을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생각해서 하는 게 아니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되어야하는 건데 그걸 의식적으로 하려고 하니 도저히 할 수가 없어지는 그 느낌. 나도 이전에 실제로 그런 식으로 할 줄 모르게 되어버려서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던 사소한 움직임들이 있어서 엄청 공감하면서 읽었었다.
내게 그림이란 게 늘 그런 거였다. 분명히 ‘이렇게 그려야지’하고 마음속으로 이미지를 떠올리고 손을 움직이면 그렇게 그려져야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 같은데, 나는 계속 ‘이 펜을 어떻게 쥐고 손목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거지?’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글씨는 쓸 수 있어도 그림은 원하는 대로 그리기가 너무 어렵다. 나는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지 배운 적이 없어서 할 수 없다는 생각만 든다.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그리는 것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 사실 그건 배워서하는 게 아닌데 어떻게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생겨날 수 있는거지?라는 의문을 갖는 순간 그 일도 부자연스러워지고 말았다. 나도 이젠 매일 거울로 내 얼굴을 보는데, 선생님이 기억하고 있는 자기 얼굴을 떠올리면서 자기 얼굴을 완성하라고 했을 때 난 진짜 아무런 이미지도 떠오르지 않아서 몹시 당황했다. 폰에 있는 내 사진을 켜서 봐야하나 싶었다.
못하는 건 하기 싫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더더욱. 비웃음 당하는 것, 웃음거리가 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심한 편인 것 같다. 그래도 어린 시절보단 나아진 편이다. 미술시간의 그 캐리커쳐 그리기는 재앙이었다. 내가 봐도 너무 못 그렸고 나름대로 내 특징을 잘 잡아내서 귀엽게 그려주었던 그 친절한 여자애가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실망하던 그 순간이 내겐 너무 끔찍했다. 기억이 흐릿하지만 아마 나한테 못된 말을 하거나 비웃지도 않았을 게 분명한데 좌절감만 기억에 남았다. 스무 살 이전의 기억들을 돌아보면 분명 좋은 일들도 있었을 텐데 나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기억들만 살아남아있는 것 같다.
그나마 이번 프로그램은 내가 그 사람의 얼굴을 다 완성하는 게 아니라, 밑그림만 그려주고 그걸 바탕으로 본인이 본인 얼굴을 다른 투명 필름에 다시 그리고 색칠하고 배경 칠하고 해서 완성하는 거였다. 즉, 완성작은 결국 본인이 다 그리는 거고 타인은 맨 처음 참고가 될 밑그림만 그려주는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부끄럽고 도망치고 싶었다. 노래도 못하는데, 그래서 동아리같은 데서 선배들이 신입생 돌아가면서 노래 시키는 그런 상황이 항상 최악이었다.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심장이 옥죄어오는 듯한 그 느낌, 또라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도망쳐버릴까하는 고민을 진지하게 하고 있었던 그 순간들. 도대체 왜 노래를 못하는 신입생은 한명도 없는 건가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른 사람들은 다 노래를 잘했다. 음치라고 할만큼 음을 틀리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부르는 걸 보면서는 원곡의 음과 같은지 다른지에 대해 위화감을 통해 대충 느낄 수 있지만 내가 부르고 있는 중에 내 목소리가 원곡의 음이나 반주와 맞는 음인지는 도저히 모르겠다. 그걸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지를 모른다. 사실 판단이 아니라 그냥 느껴져야되는 건데 안 느껴진다. 그래서 내가 못해도 괜찮은 안전한 사람들만 있는 곳이 아니면 노래 부르는 게 싫었다.
어제 그림을 그리면서, 다른 사람들은 즐겁게 그리거나 혹은 자신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물론 각자 생각하고 느낀 건 완전히 달랐다)동안 나는 못하는 걸 하는 게 왜 이렇게까지 싫을까에 대해 생각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나처럼 느낀다면 나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별로 해본 적도 없는데 못하는 게 당연하지, 못하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야, 그냥 즐겨, 그냥 해봐, 뭐 어때. 누가 뭐라고 하니? 지금 시험보는 것도 아니고 괜찮아.” 실제로 어제 선생님도 끊임없이 말씀하셨다. “잘 그리고 못 그리고가 없는 활동”이라고. 그러나 남들이 아무리 판단하지 않는다해도 내가 일단 스스로 판단한다, 잘 그렸는지 못 그렸는지 그리고 애초에 잘 그릴 수도 잘 그려질 리도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이미 그렇게 믿고 있다. 이 못 그린 것을 어떻게 감당해야할지를 이미 걱정하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 요즘 새로운 걸 배우는 게 힘든 걸까하고 생각했다. 처음 하는 건 당연히 못하는데, 내가 그 못하는 내 모습을 견디기 힘들어하니까. 처음부터 잘하고 싶고, 쉬웠으면 좋겠고 쉬운 것만 하고 싶다. 양아치도 아니고. 인생이 생선회도 아닌데 날로 먹으려고 한다, 계속.
요즘 클래식기타레슨을 듣고 있는데, 최근 한달동안 그만 배울까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그만두려고 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내가 연습을 안하기 때문이다. 양심이 있어서 연습할 시간이 없어서라고는 못하겠다. 그냥 안 하는 거다. 일주일에 하루, 한 시간 레슨 듣고 다음 레슨까지 일주일동안 연습을 안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실력이 늘 리가 없다. 그러니까 다음 시간에 가서 지난 시간에 배운 거 해보라고 하면 “이걸 했었다고요?”하면서 못하는 걸 넘어서 심지어 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혐오하고 있다. 지난 시간에 한 건데 진짜 더럽게 못한다. 당연하다, 연습을 안 했으니까.
생각이 이렇게 흘러간다. 1) 레슨만 듣고 연습을 안 하면 실력이 안 는다 → 2) 그럼 왜 연습을 안 하나? → 3) 모르겠는데 하여튼 안 한다 → 4) 그렇다는 건 니가 별로 기타가 배우고 싶지 않은 거 아냐? → 5) 그런가? → 6) 그럼 별로 하고 싶지도 않고 실력도 안 느는 데 돈까지 내고 레슨은 왜 듣지?
근데 어제 깨달은 건 연습을 안 하고도 수업을 따라갈 정도만큼 잘했다면 레슨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을 거라는 거다. 만약 일주일동안 연습을 안하고 가도 선생님 앞에서 스스로 생각하기에 초보치고는 괜찮은 정도로 연주할 수 있었다면 연습을 안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스트레스 받진 않았을 것 같다. 근데 연습을 안하는 만큼 진짜 더럽게 못하니까 너무 부끄럽고 도망치고 싶고 짜증 난다. 가끔 연습을 좀 하면 좀 낫긴 한데 그렇다고해도 엄청 많이 연습하는 게 아니니까 내가 원하는 만큼 안 틀리고 잘 칠 수 없다. 선생님은 틀리는 것에 집중하지 말고 예쁜 소리를 만드는 데 집중하라고 하지만 음이랑 박자도 제대로 못 맞추고 있는데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 악보랑 손가락 보기 바쁘다.
그나마 선생님이 항상 “틀려도 괜찮아요, 다시 하면 돼요. 그냥 다시 하면 될 뿐인데 뭐가 문제겠어요.”라고 말해줘서 지금까지 다니고 있다. 가끔 이게 기타레슨인지 심리치료인지 모르겠다. ‘틀리는 건 문제가 아니다, 그냥 다시 하면 된다’는 말이 그 정도로 위안이 된다. 삶에서 자꾸만 틀린 선택을 해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런지. 항상 틀리면 안 돼! 다음 기회는 없어!라는 식으로, 한번에 잘해야 된다는 식으로 살아와서 적당히 할 수 있을 것 같은 것만, 될 것같은 것만 도전해온 걸까.
그림을 다 그리고 각자의 그림을 설명하는 데 시간이 많이 지나서 어제의 수업은 짧았지만, 이번 수업 자료에서 ‘확실하지 않은 것을 견디는 힘’이라는 말이 마음에 남는다. 그걸 참 못 견뎌했다. 차라리 틀리더라도 빨리 결과를 알고 싶었다. 이건 이거! 저건 저거! 딱딱 정리해서 끝을 맺어두고 싶었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견디는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바로 알게 됐다. 어떤 개념은 그런 개념의 존재만으로도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방식으로 생각하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
회복탄력성을 ‘적응유연성’이라고도 부른다는 말도 역시 마음에 남았다. 회복탄력성이란 말도 좋아하던 말이지만 적응이라니.
‘어쩌면 우리는 고통을 견디는 마음의 힘이 그 무거운 짐의 무게를 오랫동안 들고 버텨내는 힘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바깥의 상황에 잘 살피고 유연하게 적응하는 것이 고통으로부터 회복되는 방법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라는 문장을 읽고, 회복이란 것은 단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나가는 것이구나라고 깨달았다. 그 말이 위안이 되는 이유는 ‘회복될 수 없다’, 즉 ‘다시는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을 근본적으로 다시 보게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회복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회복이라는 것은 단순히 이전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다만 새로운 상황에 새로운 나로 적응해나가면 된다.
어제 내가 그림의 배경을 좋아해서 메모해뒀던 글로 온통 채워놨는데, 거기에도 우연히 이런 말이 나온다.
‘싸움은 해결을 통해 갈등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넘어서 성장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싸움의 궁극적인 목표는 싸움을 일으키는 갈등을 넘어서는 것, 즉 관계의 성장과 자기 이해이다.’ (<싸움의 기술>, 정은혜)
공교롭게도 이 책을 쓰신 분도 미술치료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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