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팬텀스레드를 봤다

참참. 2020. 10. 31. 14:19

요즘 토요일마다 나가는 심리학 모임에서 <팬텀스레드>라는 영화를 봤다. 아직도 제목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용은 매우 거칠게 요약하자면 우드콕 의상실의 나이 많은 남자 디자이너와 알마라고 하는 여성의 연애 및 결혼생활 이야기다. 취향으로 따지자면 좋아하는 영화는 전혀 아니었다. 장르로 따지자면 연애와 결혼 얘기지만 로맨스 장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다고 해야할까. 등장인물들에 확 감정이입이 되지 않다보니 영화도 몰입이 잘 안 되는 느낌. 사실 난 영화에 대한 식견도 없고 평소 영화를 별로 즐겨보지도 않는다. 남들 다 본 영화도 안 본 게 더 많을 정도다.

근데 모임에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점점 어딘가 일그러지고 비틀려있던 것 같은 영화 속 인물들에서 나를 발견하게 됐다.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우드콕 의상실에서 지내게 된 알마가 아침식사에 함께하던 장면. 알마는 빵에 버터를 바르는데, 예민한 레이놀즈(남주)는 너무 시끄럽다고 핀잔을 준다. 아침은 조용해야하며 이렇게 시끄러운 소리로 자신의 집중을 깨뜨려서는 안된다고. 알마는 당신이 너무 예민한 거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그동안 레이놀즈가 모델로 쓰다가 차버린 수많은 젊은 여성들은 이 싸움에서 이긴 적이 없었다. 옆에서 레이놀즈의 누나인 시릴도 레이놀즈를 옹호한다. 결국 알마도 다른 여성들이 그랬듯 식사의 소음을 극도로 줄이는 듯 보인다.(나중에 여차저차한 극단적(?)인 사건 이후 관계의 주도권을 알마가 가져가고나서 다시 식사장면이 나오는데 알마가 시끄럽게 빵에 버터를 바르고 레이놀즈는 그걸 불편하게 쳐다보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끝낼 수 없는 논쟁이 있다.

“니가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해” vs “니가 너무 예민한거야”

“니가 나를 화나게 했어” vs “이런 걸로 화를 내는 니가 이상한거야”

(“왜 화를 내고 그래” vs “니가 날 화나게 만들잖아”)

과연 화를 내게 만든 사람이 잘못한 걸까, 화를 내는 사람이 이상한 걸까?

화를 낼 만한 상황인지 별것도 아닌 일인지는 누가 판결내려줄 수 있나?

우리는 누구나 나의 나쁜 짓에 대해서는 ‘누군가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혹은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라고 생각하고 타인의 나쁜 짓에 대해서는 ‘성격이 나빠서, 천성이 안 좋아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내가 화를 낸 것은 그럴만해서(니가 날 화나게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내는 것이고 상대가 화를 내는 것은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괜히 화를 내는 것이 된다. 과도하지 않다면 이건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자기방어이며, 오히려 자신과 타인에게 똑같은 판단의 잣대를 가져야한다는 강박 때문에 자기 자신도 자기 편이 아니게 될 위험도 있다.

문제는 친밀한 두 사람의 관계에서 한쪽이 주도권을 잡을 때이다. 이 끝나지 않는 논쟁에서 한쪽이 계속 이긴다면 반대쪽은 어떻게 되겠는가? A와 B가 있는데 A가 화를 낼 때 A는 B에게 “너 왜 이렇게 날 화나게 만드니? 제발 날 화나게 만드는 그런 행동들 좀 하지 마!”라고 해서 B가 결국 거기에 수긍을 한다고 해보자. 그럼 B는 이제 행동의 제약이 생길 것이다. 물론 사랑한다면 서로가 싫어하는 행동을 조심하는 건 기본이자 핵심 중 하나일 것이다. 이것들을 적절히 주고받을 수 있다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반대로 B가 화를 낼 때 A가 “왜 그런 것가지고 화를 내고 그래? 너 진짜 이상하다”라고 했을 때도 B가 결국 거기에 수긍을 하는 상황으로 흘러갈 수 있다.

쉽게 말하면 A가 화를 내는 상황에서도 A가 이기고 B가 화를 내는 상황에서도 A가 이기는 것이다. 이 일이 반복되면 B는 갈수록 A에 의한 행동제약이 심해지고 그를 화나게 하지 않으려 눈치를 보게 되는 동시에 자신의 불만은 자신의 과도한 예민함이나 이상한 성격 등 자신의 탓으로 돌리게 된다.

내가 맞게 이해했다면 이것이 심화되면 심리적인 학대(hidden abuse)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모르고 그랬다, 일부러 그런것이 아니다, 너를 사랑해서 그랬다 등) 심리적인 학대를 받게 되면 아래와 같은 증상을 보인다고 한다.

1) 계속해서 사과한다
2) 항상 충분하지 않다고 느낀다
3) 비판에 매우 민감해진다.
4) 누군가 동의하지 않으면 쉽게 무너진다.
기타 등등

스물한 살에 경험한 첫 연애에서 나도 레이놀즈같은 면이 있었다. 말싸움이 시작되면 꼭 이겨야 직성이 풀렸다. 당시 여자친구는 나보다 나이가 한 살 어렸고 대학 신입생이었고 연애는 둘 다 처음이었다. 그가 좀 더 적극적이고 말이 많고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었다면 달랐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관계에서는 내가 훨씬 더 열정적이었고 관계의 주도권을 틀어쥐고 있었다.

나는 물론 최선을 다했지만 너무 어리고 경험도 없었고 학창시절동안 쌓아온 연애라는 관계에 대한 로망과 환상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내가 그 많은 말싸움에서 절대 지지 않으려고 하면서(그땐 그러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 나름대로는 내가 양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없진 않았을테니), 답정너 식의 질문을 던지고 그 사람의 감정을 의심하고 내가 원하는대로 행동해주길 요구했던 그 모든 일들을 헤어지고나서 몹시 후회했다. 다른 연애를 경험하면서 내가 행했던 일들을 상대방이 나에게 행하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더더욱 후회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내 모든 연애상대는 나보다 연상이었다. 어쨌거나 난 여전히 관계의 주도권을 쥐고자 했고 말싸움에서도 절대 쉽게 물러서지 않았으나 이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내 기준에서는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니까, 내가 좀 더 참을 수 있지. 져줄 수 있지. 근데 그렇게 지고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 나는 내 마지노선이 어딘지 몰랐다. 지고, 지고, 지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남은 건 하나도 없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웠어야했는데, 포기하지 않고 더 열심히 더 잘 싸웠어야했던 지점을 지키지 못했고 전선은 속절없이 뒤로 밀려 결국 내가 무너졌다. 상대를 탓하기보단 차라리 나를, 나 자신을 탓했다. 상대를 설득하기보단 내가 포기했다. 내가 원하는 것들, 내가 원하는 방식들을. 그게 올바른 일이고 상대를 위하는 일이라 여겼는데, 감당하지 못할 일이었고 결과적으로 상대를 위하는 일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반박하고 싶은 말들이 떠오르지만 참는 방식이었다면, 나중에는 반박할 말이 아예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시작하기도 전에 패배를 받아들였다. 난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거 좀 양보해도, 이거 좀 포기해도, 내가 돈을 좀 더 벌어도, 다른 일정 때문에 아플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해도 난 괜찮다고, 진심으로 그런 줄 알았다.(그 하나하나의 사안들만 보자면 너무나도 작고 사소해서 사실 정말로 괜찮았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결국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함으로써 좌절과 무기력에 빠져들었고, 그 원인을 언제나 나에게서만 찾을 수는 없었으므로(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어디서부터 잘못됐지?) 상대에 대한 원망도 사라지지 않았다. (성인군자는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확실해졌다.) 서로를 존중하는 동등한 관계라는 게 말은 쉬운데 어떨 때는 상상 속의 동물처럼 느껴진다.

'일상 > 2020~20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묘지, 아만자, 자전거, 커피식탁, 그리고 어머니  (0) 2020.11.15
고양이  (0) 2020.10.07
괜찮아요  (0) 2020.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