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할머니는 더 이상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참참. 2020. 4. 6. 06:08

 

강애식, 21년생 우리 할머니 성함이다. 나는 할머니 손에 자랐다. 부모님은 맞벌이 하시느라 늘 늦게 들어오셨고, 아침밥도, 저녁밥도 다 할머니가 차려주셨다. 고등학교 때부터 타지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그렇게 떠나기 전까지는 늘 할머니가 해주는 밥을 먹고, 할머니가 매일 청소하는 방에서 할머니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할머니는 날 많이 예뻐하셨다. 어쩌면 그 가장 큰 이유는 단지 내가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할머니가 날 먹여 살리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동안 할머니에게 들어오는 제일 좋은 건 내 몫이었다.

그랬던 할머니가, 이젠 나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신다. 몇 년 전에는 내가 전화만 하면 우셨는데, 이제는 울지도 않으신다. 오히려 그게 더 나은 일일까. 날 전혀 기억하지 못하신다는 걸 느끼고나서, 이제 내가 기억하던 할머니는 없구나하고 생각했다. 내게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하는 생각도 문득 뇌리를 스쳤다. 그랬다가, 그게 얼마나 못된 생각인가하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해도, 할머니는 여전히 할머니다. 정말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나는 할머니께 내 미소를 보여드릴 수 있다. 당신에겐 그저 낯선 젊은이의 호의가 될지라도. 10초 뒤에 다시 그 일을 잊으시고 또 같은 질문을 반복하신다 해도.

할머니는 그 시절 많이들 그러했듯이 스물 남짓한 나이에 내 고향 동네로 시집을 오셨다. 그곳에서 당신의 표현에 따르면 '오막막설이'(난 아직도 이게 표준어로 어떤 단어인지 궁금하다)같은, 집 같지도 않은 집에서 빈손으로 시작했다. 악착같이 농사를 지어 땅을 사고, 집을 새로 짓고, 또 땅을 사면서 자식을 일곱 낳았고, 여섯을 어른으로 키워내셨다. 할머니가 돈을 모아 세번째로 새로 지은 집, 지금으로부터 딱 50년 전에 지어진 그 집이 내가 태어나서 그곳을 떠나기 전까지 살던 집이었다. 내가 얼마 전에도 잠시 돌아가서 살았을 만큼 낡았지만 여전히 괜찮은 집이다.

할머니가 키워낸 자식은 아들이 셋, 딸이 셋이었는데, 그 중 딸 둘은 암으로 먼저 돌아가셨다. 내가 아주 어리던 때여서 나는 그 두 고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그리고 할머니의 하나 남은 딸인 내 막내고모는 남편과 첫째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으셨다. 다음으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는 남편과 딸 둘과 막내사위를 먼저 보내신 셈이다. 그럼에도 그 슬픔이 할머니의 부지런한 삶을 멈춰세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자식들이 다 독립한 뒤에도 마지막까지 할머니 곁에 남았던 막내아들, 내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을 때는 할머니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더 안 좋았던 것은 나도 기숙사에 들어가느라 집을 떠난지 서너 달 밖에 안 된 때였고, 당시 아직 운전을 배우지 못했던 어머니도 직장생활을 지속하기 위해 시내에 새로 집을 구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늘 웃던 사람 좋은 당신의 막내아들과 싹싹한 막내며느리, 손자, 손녀까지 다섯이서 북적대며 살던 집에 갑자기 할머니 혼자만 남았다. 그때 할머니 나이가 이미 아흔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늘 아프다고 말씀이야 하셨지만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동네의 웬만한 70대 할머니들보다도 정정하시던 할머니였다. 하지만 더 이상 누군가를 돌보지 않게 된 할머니는 빠르게 스러져갔다. 마치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듯했다. 아니, 어쩌면 그건 해야할 일이 쌓여있었기 때문에 한번도 질문해볼 새가 없었던 삶의 의미를 혼자 곱씹게 되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할머니 앞엔 늘 삶의 의미보다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놓여있었으니까.

보다 못한 막내 고모가 서울로 할머니를 모셔갔다. 평생을 돌보았던 할머니는 돌보아지는 존재가 됐다. 그게 할머니에게 좋은 일이 됐으면 좋았을텐데, 할머니가 전화만 하면 우시기 시작했던 게 그때부터였다. 밭과 동네를 누비며 종일 무언가 만들어내던 평생의 터전에서 낯설디 낯선, 무엇도 본인 힘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곳으로 가실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슬프다. 할머니 못지 않게 악착같이 살아온 강인한 막내 고모도 기억을 잃어가는 자신의 엄마를 보살피며 많이 깎여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잔소리가 많으신 분이었는데, 그래서 처음엔 할머니에게도 왜 기억을 못 하느냐고, 몇 번을 말해야 하느냐고 다그치시는 모습을 내가 갔을 때도 끊임없이 볼 수 있었는데, 이젠 그저 허허 웃으신다.

할머니를 못 뵌지 너무 오래됐다. 내가 나빴다. 난 한번도 좋은 자식노릇을 한 적이 없다. 그 시절에 내가 기숙사학교로 떠나지 않았다면, 할머니 곁에 남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떠올리다 털어버렸다. 내게도 그저 혼자 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기분으로 보냈던 시간이었으니까. 할머니는 더 이상 날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할머니를 기억한다. 오랜 시간 나를 위해 살았던 할머니를 내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은 할머니를 뵈러 가야겠다.

'일상 > 2020~20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첫 월급  (0) 2020.04.10
[지금, 그리고 영원히 지금], 루티너리 어플  (0) 2020.04.04
벚꽃과 키보드  (0) 2020.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