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20~2022

컴퓨터 설치

참참. 2020. 3. 21. 05:41

 

다니는 회사에 분명 '프로그래머'로 취직을 했는데 이번주엔 프로그래머보단 컴퓨터 수리기사에 가까웠다. 프로그래머야 기본적으로 컴퓨터에 관심이 있는 편이니까 다른 직원들에 비해 하드웨어적인 부분도 조금 더 친숙하기야 하겠지만, 내가 다른 직원들 컴퓨터 봐주고, 컴퓨터 설치하는 일 하러 취직한 건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해야하지 싶은 생각은 들었다. 물론 IT지원팀이 따로 있는 큰 회사도 아니고 체계도 별로 없고 그냥 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는 식이긴 하지만, 사실 난 할 줄 아는 사람의 범주에 들어가기 어렵다. 근데도 시킨다. 시키면서 왜 이렇게 못하냐고 한다. 솔직히 그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하면 새로 고용을 하든가, 그냥 있는 사람 중에 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는 거면 나보다 잘하는 본인들이 하시든가하면 될텐데, 시켜놓고 답답해하는 게 나도 짜증난다. 나도 내 컴퓨터도 조립하기 어려워서 조립해주는 데에서 완제품 사서 쓰고 최근에야 그래픽카드 바꾸고 램 추가하고 SSD 단다고 열어서 한번 만져본 게 끝인데. 컴퓨터를 사서 스스로 다 조립해서 혼자 설치해본 경험이 단 한번도 없는데 그걸 어떻게 잘하겠나.

체계는 진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없어서, 직원들 컴퓨터에 라벨링도 제대로 안 되어있다. 누가 퇴사해서 그 컴퓨터가 다른 사람한테 가면 그게 어느 컴퓨터인지, 사양은 어떻게 되는지, 언제 구매했는지 이런 기록조차 하나도 없다. 이런 건 프로그래머가 아니라 회사 재산을 관리하는 재무팀이든 어디든 관리해줘야하는 것 아닌가, 아무리 컴퓨터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그냥 다른 물건 관리하는 만큼만이라도 관리를 해야지. 회사에 여분의 컴퓨터나 모니터가 있는지없는지를 그냥 회사에 오래 근무한 프로그래머 한 명의 머릿속 기억에만 의존하고 있으니 관리가 되는 게 더 이상하다. 이번에 모든 직원(서울 본사에만 50명이 넘는데)의 컴퓨터 사양을 조사했는데(다 나보다 기본적으로 회사선배고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가서 한명씩 '죄송한데 잠시만 컴퓨터 사양 좀 봐도 될까요?'하면서 조사했다.) 윈도나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관련해서 정품인증하라는 오류메시지 뜨는 컴퓨터도 몇 대 있었고, 램 4기가에 하드용량이 128기가가 전부인 컴퓨터는 상당히 여러 대 있었다. 진짜 문서작업만 한다면 상관없긴 한데, 이 와중에 포토샵까지 쓰는 분도 있었다. 다행히 그 조사 보고를 올리고 이틀만에 램 4기가인 분 중 불편을 호소한 분들께는 4기가 하나씩 더 달아드리고 하드용량이 몹시 부족해보였던 다섯 분한테도 500기가 HDD 하나씩 달아드릴 수 있었다. (128기가 쓰지만 부족함을 전혀 못 느낀다고 하는 분들은 아직 안 달아드림.)

D드라이브에 추가된 용량 약 465기가를 '내컴퓨터'에서 눈으로 보면서도 어떻게 그곳의 용량을 써야하는지를 몰라서 설명해줘야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보다 매일 쓰는 컴퓨터에 얼마나 무관심하고 무지한지를 알게 됐다. 불과 3~4년 전까지만해도 외장그래픽카드 포트와 내장 그래픽카드 포트도 구분 못해서 모니터 왜 안 나오지하고 있었던 나같은 컴알못이 이 회사에서 컴퓨터 잘 아는 순위로 상위 5% 수준이라는 게 직원들이랑 컴퓨터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보니 납득이 됐다. 회사에 자기 원래 직무와 관련없이 이 일들(컴퓨터를 관리하고 새로 설치해주는 등)을 조금씩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긴 하겠구나. 나한테 물어봐도 나도 구글링해서 가르쳐줘야하는 판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뭐라고 검색을 해야하는지 검색어조차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고, 검색결과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문서에 있는 용어나 다른 내용들을 추가로 검색해야할 수도 있다. 조금이라도 더 아는 사람이 해주면 좋긴 하지, 근데 회사에 직원이 한두 명이냐고, 무슨 친한 친구 컴퓨터 맞추는 거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나도 다른 업무가 있다고! 홈페이지도 고쳐줘야하고 데이터베이스 관리 업무도 계속 요청 들어오고, 다른 직원들 단순 반복업무 줄여줄 php 프로그램도 짜야하고, 그밖의 잡다한 파일 변환해서 사내시스템에 올려주는 일도 잔뜩 있는데, 다들 언제까지 되냐고 물어보는데! 어휴!

소프트웨어적인 것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컴퓨터 설치하고 세팅하고 부품 갈아끼우고 하는 것까지 배울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 나쁠 건 없는데 그건 내가 그렇게 생각해야지, 자기 잡일 시키면서 그렇게 말하면(회사에서 다양하게 배울 수 있으니까 회사에 감사해라, 주말에 아는 사람한테 컴퓨터 수리 좀 배워와라 등) 그건 좀 아니지 않나. 내가 프로그래머로서 못해서 욕 먹거나 배우는 것, 주말에도 공부하는 것 등은 정말 배우겠다는 마음가짐이 잘 되는데, 이거 하면서 자꾸 옆에서 비웃고 있으니까 배우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잘 안 들어가지고 내가 왜 이러고 있지싶은 마음이 자꾸 됐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어차피 컴퓨터란 게 하드웨어랑 소프트웨어라는 측면이 다 있는 건데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못하는 상태로 계속 있는 것보다야. 나도 조금씩 업그레이드는 했지만 오래 쓴 내 컴퓨터도 월급 모으면 바꿔야하고, 그때도 도움 되겠지, 뭐. 그리고 사실 별것도 아니지만 컴퓨터 봐줬다고 직원들이 고맙다고 할 때는 좀 뿌듯하다. 매일 쓰는 컴퓨터고 당장 업무효율, 생산성, 일상의 스트레스와 직결되는 회사원들의 핵심 연장이 컴퓨터인데 그 지경을 해서도 그냥 그러려니하고 쓰고 있다니, 본인이 불편을 못 느끼는 분들이야 그나마 괜찮지만 그 사양으로 힘들게 포토샵 돌리던 직원들은, 할말하않.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적어도 7시 되면 회사에 남아있는 직원은 거의 없고 보통은 6시 10분에서 15분 전에는 퇴근하는 편에, 직원복지 관련해서도 계속 뭔가 좋아지고 있고 정부에서 해주는 지원같은 것도 직원들이 받을 수 있다면 회사에서도 다 알아서 신청해주고 같이 해주려는 편이고, 사람답게 대해주고 등) 회사라고 생각하고 업무능력 면에서 아주 많이 부족한 나를 성장가능성 믿고 뽑아준 데에 몹시 감사하면서 다니고 있지만 솔직히 컴퓨터 관리는 너무 주먹구구식이야!ㅠㅠ 아마 이것까지가 내가 회사에서 해줘야하는 역할이 될 것 같다. 나도 잘 모르는데 적어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건 알겠다. 개선의 필요성을 가장 크게 느끼는 사람이(물론 윗분들도 개선해야한다고 생각은 하신다, 별로 급한 일이라 느껴지지 않고 얼마나 엉망인지 잘 못 느껴서 그러시는 것뿐. 실제로 높은 직급에 있는 분들이 오래된 컴퓨터 회사 내에서 사양이 제일 낮은 편에 속하는 컴퓨터들을 별 불만없이 쓰고 계시고.) 공부해서 해야겠지, 아직 말단이지만. 근데 원래 하는 업무에다 이 일까지 하려면 하루에 13시간씩 일해야할 것 같아서 그렇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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