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살고 싶다고 서울을 떠났는데, 3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돌아오고 보니 별 기술도, 경력도 없는 데다 대학도 그만둔 30대가 되어있었다. 나름 작은 청년 단체에서 3년 넘게 일하며 대표도 맡았었는데 그건 어디서 경력으로 쳐주지도 않았다. 처음엔 야속했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딱히 업무능력이라고 할 만한 걸 익히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엑셀이니 파워포인트니 하는 것들은 대학생들 과제할 때 쓰는 수준에 자격증도 없는 데다 공공기관과 일할 때 필요한 제안서나 공문서라도 많이 만들어본 것도 아니다. 기획서를 잘 쓴다거나, 명백하게 성과가 나온 프로젝트 이력이 있거나, 다른 내세울 능력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하나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시골에선 학원 강사였는데, 그것도 사교육 시장 아니면 쓸 데가 별로 없는 경력이었다. 도저히 학원에서 더 일하고 싶지는 않았다. 질질 끌려와 억지로 앉아있는 녀석들한테 별 중요하지도 않은 지식을 외우라고 앵무새처럼 똑같은 소리만 반복하는 느낌이었다. 의미나 즐거움도 못 찾았을 뿐더러 학생 수가 안 늘어서 돈도 별로 못 벌었다.
속은 좀 쓰렸지만 지금까지의 삶에서 앞으로 먹고살 능력을 갖추는 데에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직 젊다는 것 하나만 믿고 전혀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침 중학생 때 프로그래머가 꿈인 적도 있었던 터라 프로그래밍을 한번 배워볼까 하던 찰나에 아는 지인이 원한다면 가르쳐주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혼자 인터넷 찾아보고 여기저기 이력서 넣을 때는 서류에서 다 떨어지더니 그래도 아는 사람들을 만나니까 일자리 소개시켜주는 사람도 있고 이렇게 기술을 가르쳐주겠다는 것도 있는 걸 보니 ‘활동’하면서 그래도 제일 중요한 ‘사람’은 남은 것 같아 든든했다. 마음먹은 김에 앞으로 계속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조금이라도 배워보자는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물론 월세는 내야하니 급한 대로 알바라도 구했는데 다행히 집 근처 다이소에서 일할 수 있었다. 아침에 들어오는 물류 상하차 일로 주 6일, 하루 3시간씩 근무해서 월 90만원 즈음 벌었다. 집에서 따릉이로 10분 거리였고 시급으로만 따지면 지금 일하는 곳보다 나았다.
어디 수료증이라도 발급해주는 학원도 아니고 지인한테 개인적으로 배우는 것인 데다, 오랜만에 서울 와서 사람들 만나러 다니고 취미생활도 한다고 바빠서 공부의 시작은 느슨했다. 초심자인 내게 너무 어려운 수준으로 가르친다고 느끼기도 했다. 점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공부하라고 쥐어준 자료는 죄다 영어라서 한 장 읽는데 세월이 걸렸다. 답답하고 어려웠다. 육체노동도 익숙하지 않아서 다이소 고작 3시간 일한다고 꼬박꼬박 낮잠까지 잤다. 돈이 없다는 생각에 마음은 조급한데 뭐가 빨리빨리 배워지는 것 같지는 않고 그런 상태로 한 달 정도가 지났다.
그때 집 근처에 있는 ‘무중력지대’라는 서울시가 운영하는 청년공간에서 사람을 뽑기에 지원했다. 공부도 공부지만 집에서 가까운 곳에 기회가 났다는 게 몹시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일하는 사람들도 다 좋은 사람들 같아보였다. 이번엔 꼭 될 줄 알았는데 또 떨어졌다. 그러고서야 정신 차리고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코로나 때문에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있었지만, 취미생활이나 다른 활동도 거의 다 정리했다. 그러면서 냉정하게 내 수준을 진단하고 다이소에서 최소한의 생활비만 벌면서 공부에 매진하면 6개월 정도 후엔 그래도 이 분야에 한번 지원해볼 정도는 되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계획도 세워봤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을 때 갑자기 이 지인이 사람 하나 추천해달라는 곳이 있는데 한번 지원해보겠느냐는 얘길 꺼냈다. 그 얘길 듣고 몹시 당황했다. 취직이야 하고 싶지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생초짜인데 정말 나를 프로그래머로 추천을 하겠다는 얘기인가? 갔다가 아무것도 못하면 추천한 사람도 곤란해지는 건 아닐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게다가 당장 일주일 뒤에 면접을 보는 일정이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나보다 훨씬 잘 아는 전문가가 가기 전에 필요한 거 가르쳐주겠다고 하니 덮어놓고 거절하는 것도 이상했다. 어떤 회사인지 좀 찾아봤더니 아이들 먹을거리 만드는 회산데 나쁘지는 않아보였다. 두렵기도 했지만 면접경험도 해봐서 나쁠 거 없으니 결국 안 되더라도 한번 지원이나 해보겠다고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기존에 배우던 것과는 조금 다른 프로그래밍 언어를 급하게 속성으로 기초만 딱 배우고 면접을 보러 갔다. 세 분이 들어오셨는데, 현재 회사에 근무하는 유일한 프로그래머이신 과장님이 이런저런 업무 관련 질문을 했다. 내 대답은 거의 다 ‘아니오, 그건 해본 적 없는데요’, ‘아직 배운지 얼마 안 돼서 그건 잘 모릅니다’ 등 이었다. 배운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실전 경험은 전혀 없다시피 하니 할 수 있다고 대답할 만한 게 별로 없는 게 당연했다. 이력서에도 관련한 경력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뽑히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라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나와서 집에 가려고 지하철 타는데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가르쳐주면 잘 배울 마음은 있냐고 해서 당연히 그렇다고 했더니, 다음 월요일부터 출근해보라는 제안을 해주셨다.
전혀 생각도 못한 시기에 생각도 못한 분야로의 취직이라, 이게 정말 취직이 된 건지 얼떨떨해서 누구한테 취직했다고 맘 놓고 자랑도 못했다. 갔다가 하루 만에 잘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말 내내 벼락치기 공부도 더 했다. 근로계약서 쓰기 전까진 아직 취직됐다고 안심하긴 이르다는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월요일에 출근을 해보니 취직이 된 게 맞긴 맞았다. 정신차려보니 신입사원이 된 것이다. 분야도 분야지만 영리기업에서 풀타임으로 일 해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라 모든 면에서 진짜 신입사원이었다. 군대에서 갓 자대배치 받은 이등병 때 기분을 느끼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뭘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로 눈알만 이리저리 굴렸다. 수요일 즈음 되어서야 적어도 점심시간에 밥을 어떻게 먹는지, 퇴근은 어떻게 하면 되는지 정도는 알게 됐고, 일주일을 다 채운 지금에야 지금 회사가 하려는 사업이 무엇이고 내 역할은 뭔지, 앞으로 어떤 걸 주로 공부해서 어떤 일을 맡게 될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정신은 하나도 없다.
금요일엔 드디어 근로계약서를 썼는데, 아무리 내가 면접 때 적은 연봉을 불렀다지만 그게 그대로 쓰여 있었다. 덤으로 수습기간 3개월 동안은 80%만 준다고 하니, 그동안은 최저임금도 안 된다는 계산이 나왔다. 아직 해당 분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에 가까운 마음가짐이고 회사에서도 일보다는 공부 위주로 시킬 생각인 거 같아서 돈 받으면서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딱 1년만 이 월급으로 일하고 내년엔 많이 올리거나 가능하다면 이직할 수 있게끔 더 능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연봉을 노출하는 건 절대 금지라고 신신당부도 하셨다. 게다가 약간 수상해 보이는 ‘서약서’라는 것도 썼다. 주 내용은 회사의 지시에 절대복종하라는 거였다. 중소기업 치고 그리 나쁜 회사 같진 않은데 가끔씩 묘한 면이 있다. 회사 경험이 없어서 다른 회사도 이런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곤 해도 아직은 출근한지 일주일밖에 안 돼서인지 드디어 안정적인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곳에 들어와 있다는 것, 당장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는 데도 공부하면서 근무할 수 있게 해줬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마음이 더 크다. 앞으로 기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성장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드는 것도 좋다. 그렇게 취직하고 싶다가 막상 취직하면 세 달 만에 퇴사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뀐다고들 하는데, 나는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