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13~2019

점수에 목숨 거는 사람

참참. 2019. 11. 15. 09:23

점수에 목숨 거는 사람

 

시험을 보면 점수가 나온다. 게임을 해도 점수나 그 비슷한 게 나온다. 점수에 얽매이고 점수에 목숨 거는 게 싫었다. 세상에 정말로 소중한 일, 중요한 능력은 점수가 나오지도 않고 점수로 매기기도 어려운데, 맨날 단순지식 하나 더 외워서 점수 몇 점 더 맞는 식으로만 가르치고 배우는 게 한심했다.

직장에 들어가고나니 누가 점수 매겨줄 일이 없었다. 그저 할 일이 있을 뿐이다. 못하면 욕을 먹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로 못했는지, 어떻게 얼마나 개선해야하는지는 알아서 생각해야 한다. 사람 관계도 그렇다. 누가 내 첫인상에 대해 점수를 매겨주지도 않고, 내게 호감이 있는지, 반감이 있는지, 관심이 없는지 수치로 표기되지 않는다. 그저 분위기를 느끼고, 공감능력을 발휘해서 넘겨짚을 따름이다. 완전히 잘못 짚는 경우도 왕왕 있다. 점수로는 알 수 없는 이런 감각을 더 일찍부터 연습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불행히도 눈에 보이는 점수가 나오는 걸 참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최근에 깨닫게 됐다.

시골에 와서 처음엔 자전거로 버티다가 결국 중고차를 한 대 사 운전을 시작한지 이제 1년 즈음 됐다. 1년이 되니 자동차보험을 갱신해야했다. 수십만원 돈이다보니 조금이라도 싸게 하려고 인터넷 다이렉트보험 견적을 여기저기 알아봤다. 그러다 여러 할인받을 수 있는 특약 가운데 '안전운전 특약'이라는 걸 발견했다. 무엇인고하니, 'T맵' 어플에 로그인해서 운전을 하면 어플이 출발부터 도착까지의 과속, 급가속, 급감속 데이터를 측정해서 '안전운전 점수'를 매겨주는데 이 점수가 높으면 보험료를 할인해준다는 것이다. 안전운전도 하고 보험료도 할인 받는다니, 게다가 할인율이 최대 11%! 당장 깔았다.

처음엔 출퇴근할 때 적당히 켜고 다니니 점수가 100점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불과 15km 남짓, 20분도 안 걸리는 매일 다니는 출퇴근길에서 새삼스럽게 과속할 일도 없었던 덕이다. 그러나 보험을 할인 받으려면 최소한 주행거리가 500km 이상이어야 한다. 보험갱신일은 다가오고, 출퇴근만 해서는 500km 채우려면 몇 주는 걸리겠고, 하루라도 빨리 채워 천원이라도 더 할인 받고 싶은 마음에 결국 편법을 생각해냈다. 마침 강릉에 오는 친구가 운전해서 온다기에 T맵을 깔고 이 아이디로 로그인해서 와달라고 했다. 친구는 흔쾌히 부탁을 들어줬다. 문제는 이 친구가 온화하고 평화롭던 평소의 인상과는 다르게 안전운전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500km는 채웠는데 점수가 60점대까지 곤두박질 쳤다.

그 세상 억울하던 기분, 보험료 할인을 덜 받는 것도 억울하지만, 그냥 점수가 떨어진 것 자체가 억울했다. 편법으로 주행거리를 채우려고 했던 내 잘못이니 억울할 것도 없다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억울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그랬는데 알고보니 아내가 아이디에 전화번호 연동을 하지 않아서 보험사측에 정보가 넘어가지 않았고, 할인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아내가 휴대폰을 바꿨고, 기록이 초기화되어버렸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고 다시 열심히 운전했다. 시작하자마자 실수를 해서 93점까지 떨어졌지만, 다시 차근차근 안전주행한 거리가 누적될수록 점수도 조금씩 올라갔다. 드디어 다시 500km를 채우던 마지막 주행에서 99점이던 점수가 딱 100점이 됐다! 기존 실수한 것 때문에 99점이 한계일 줄 알았는데 100점이 되자 어찌나 기쁘던지.(아마 내부 계산에서 99.5점이 넘으면 반올림돼서 100점으로 표기되는 것 같다.) 아내가 보험사에 전화해서 기기변경으로 해지된 안전운전 특약을 재신청했더니, 보험사 직원이 100점으로 확인되시네요, 하고 10분도 안 돼 약 5만원이 환급되었다. 하하하!

이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무척 재미있어했다. 맨날 운전하는 거 싫다고 노래를 하면서 같이 어디 갈 일 있으면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고 보던 사람이, 점수가 나오니까 갑자기 운전하고 싶어하는 게 웃기다고.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란 인간이 진짜로 웃겼다. 정말로 운전하는 게 전보다 두렵지 않아졌다. 빨리 해서 평가받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 운전할 때는 훨씬 더 집중했다. 이전에는 안전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만 알았으나, 이젠 앞차가 갑자기 멈췄을 때 '급감속'에 걸려 점수 떨어뜨리기 싫어서 앞차와 멀찍이 거리를 두고 운전했다. 이 '급감속' 항목에 걸리지 않으려면 신호등이라든지 앞 차, 옆에서 튀어나오는 사람 등을 멀리서부터 미리미리 파악하고 예상하고 계산해서 천천히 속도를 줄여둬야 한다. 이렇게 열심히 운전하다보니 운전실력도 는 것 같다.

문득 내가 매년 성실하지 못해 실패해왔던 텃밭농사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당연하지만 여기엔 평가도 점수도 없었다. 만약 이 농사일을 누군가가 매일 단위의 퀘스트로 나누어서 나한테 제시해주고, 내가 그걸 하루 수행할 때마다 점수가 매겨지거나 게임처럼 레벨이 오른다거나 그런 식이 된다면 내가 예전보다 농사를 잘 해낼 수 있을까? 진지하게 생각해본 결과 정말 그럴 것 같았다. 농사일이란 게 초보자로서는 매일 뭘 해야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안 하다보면 어느새 풀은 잔뜩 자라는데 하루하루로 보면 해도 티가 별로 안 난다. 수확은 몇 달 뒤에나 하고, 설령 수확을 한다해도 당연히 농약, 비료 잔뜩 치는 옆집 농산물이나 마트에 진열된 농산물에 비해 훨씬 작다. 하면서도 내가 잘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맞다. 비겁한 변명이다.)

아이고, 이제 보니 나야말로 점수와 게임에 길들여진 인간이었다. 모든 일이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하는 일에서 확실히 능률이 올라간다. 텃밭농사일에 매일 점수를 매겨주는 어플이 나올 리는 없으니, 결국 요점은 하고자 하는 일을 세부목표와 당장 수행할 수 있는 작은 단위의 일로 나누고, 단계마다 피드백과 보상을 설계해야한다. 누가 해주면 좋겠지만, 스스로 해야한다. 스스로 이 과정을 해낼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좀 더 의욕적으로 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적어놓고보니 수많은 자기계발서와 동기부여 강연에서 들었던 얘기들과 별 다를 게 없다. 아마 이 글도 미지 글쓰기 모임과 읽고 댓글 달아주시는 멤버님들이 안 계셨다면 분명 쓰지 않았을 거다. 새삼 동기가 되어준 미지와 멤버님들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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