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13~2019

강릉 일기

참참. 2019. 2. 8. 11:38
기분이 참 쉽게도 변한다.
가르치는 학생들이 무슨 말을 해도 대답도 안하고 고개 숙이고 책만 쳐다본다. 그런 상태로 두 시간을 넘게 수업 하는데, 울고 싶은 마음이 됐다.
이성적으로는 나도 학생 때 별로 다르지 않았다는 걸 기억하고, 나와 인간적인 교류가 전혀 없이 만난지 얼마 안 된 학생들이 설연휴 쉬다 수업들으려니 힘들고 귀찮고 공부에 지치고 그런 거 이해 되는데, 듣고 싶어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얘길 떠들자니 진짜 재미없다. 쟤들도 재미없겠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나 싶다.
그냥 때려칠까 생각하면서 퇴근했는데 덥수룩하던 머리를 자르니까 의외로 기분이 나아졌다. 기분전환하러 머리를 한다는 말을 처음으로 이해했다.
바꿀 수 없는 일에 집중하지 말자는 말도 도움이 됐다. 그래, 그들이 그런 상태인 건 내 잘못도 아니고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만둘 게 아니라면 난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더 나은 수업을 하는 수밖에.

그러고 옆에 서점이 있어서 들렀다.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소설가님이 최근에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윤이형,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책이 놓여있었다. 돈이 별로 없어서 잠깐 고민하다가 계산을 하러 갔는데, 15년 전에 강릉을 떠난 내 회원정보가 여전히 살아있고 적립금이 2만2천원이나 있어서 그걸로 책을 살 수 있었다.(나중에 알고보니 어머니께서 거기서 책 살 때 내 번호로 적립을 한 거였다.) 들떴다. 게다가 잠깐 서서 읽어본 소설 앞부분도 좋았다.

오늘 일어나서 소설을 다 읽었다. 눈물이 찔끔 났다. 고양이의 죽음과, 결혼과 육아가 사랑하던 연인 서로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과정이 너무 아팠다.
뒤에는 작가님의 문학적 자서전이 있었다. 2009년 겨울에 당시 다니던 학교 도서관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내가 선정한 작가님을 인터뷰했었는데, 작가님 자서전을 보니 그때 우울증으로 글을 쓰기 어려운 시기셨던 것 같다. 심지어 당시에 여행 중에 이메일 받으시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피곤한 몸으로 수원까지 와주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장편소설을 준비는 하고 있는데 언제 나올지 모르겠다며, 시종일관 초보 인터뷰어를 편하게 해주시면서 웃으며 말씀해주셨었는데. 아고. 그때도 감사했지만 더더욱 고마운 마음이 든다.

연애 한번 제대로 해본 적 없던 대학교 신입생이었는데, 10년이 지나고, 몇번의 연애와 자퇴와 결혼을 거쳐 여기에 와있고, 작가님도 그 사이에 고양이와 결혼과 출산과 많은 일들을 겪으시고 또 소설을 쓰시고, 그때의 소설들은 고등학생이던 내게 참 좋았는데, 지금의 이 소설은 지금의 내게 참 좋고.. 그런게 어쩐지 맘에 든다.

수상 소감 중간 즈음에 '나 역시 내 생각만큼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는 덤덤한 문장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가끔은 기뻐하며 살자'는 마지막 말씀이 크지도 작지도 않고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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