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과학 이야기

마리 퀴리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다니.

참참. 2018. 8. 10. 11:05

마리 퀴리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어? 이름은 많이 들어봤으면서도 정말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진짜 잘 모르고 있었다.


Maria Skłodowska-Curie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

퀴리는 프랑스인인 피에르 퀴리와 결혼하면서 남편의 성을 받은 것이고 현대 폴란드 사람들도, 또 살아 생전 본인도 자신을 풀네임으로 부를 때는 결혼 전의 폴란드식 성인 '스크워도프스카'를 살려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라고 즐겨 불렀다고 한다.(폴란드에서 아주 위대한 인물로 남아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랄 당시의 폴란드 바르샤바는 러시아령이었다. 폴란드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독일에 각각 지배받고 있어서 사실상 '폴란드'라는 나라가 존재하지 않던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와 같은 시기였고, 우리보다 훨씬 길게 지배받았다. 1795년부터 1918년에 독립하기 전까지 분할통치를 받는데,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는 1867년생. 그는 바르샤바에서 이미 우리의 일제강점기보다 훨씬 긴 시간을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상태에서 태어났다.
근데 폴란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릴 때부터 강하게 갖고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일화가 많다. 급기야 그가 발견한 첫 새로운 원소의 이름을 '폴로늄'이라고 붙인 것. 우리로 치면 일제강점기 시절에 우리나라의 과학자가 타국에서 연구하면서 새로 발견한 원소에 '코리아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과 다름없다.(전혀 딴 소리지만 몇년 전 일본 과학자들이 발견한 새 원소에 '니호늄'이라는 이름이 최종승인됐다.)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도 손기정이 비록 일장기를 달고 달렸지만 금메달을 땀으로써 당시의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영감을 주었던 것과 비슷하다. 이로 인해 그 당시 '폴란드'라는 나라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원소, 과학 실험 등을 이야기하면서 '폴로늄'이라는 단어를 쓸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전세계에서 그 단어를 말할 때마다 그걸 말하고 듣는 사람들에게 폴란드 출신의 과학자가 발견했다는 사실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을 것임을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프랑스 사람과 결혼해서 프랑스에서 딸들을 낳아 키웠는데 딸들에게도 폴란드어를 가르쳤고 함께 폴란드에 자주 가기도 했다.
(이런 전력 때문에 그가 죽었던 1934년, 일제강점기이던 우리나라 신문에도 당시 표기법 '큐리 부인'으로 부고와 그에 대한 기사가 났는데, 고등학생 시절 폴란드의 독립을 위한 비밀결사에서 활동했다는 식의 약간은 과장을 섞어 그의 민족적인 행보에 집중한 기사가 났다. 그 뒤에는 심지어 그런 부분을 집중조명한 소설까지 신문에서 연재했다고.)

반면 프랑스에서 전쟁이 났을 때는 파리를 버리고 시골로 피난 간 사람도 많았는데,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는 오히려 자신의 연구분야와 가까운 X선(엑스레이) 촬영장비들을 근처 버려진 병원들에 협조를 구해 그걸 차에 싣고 다니면서 군인들의 몸에 박힌 총알 등을 촬영해 빼내는 등 의료지원을 펼쳤다고 한다. 심지어 당시 십대였던 딸까지 그 트럭 한 대를 맡아 함께 활동했다고 하고 그 일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했으면 프랑스인들이 그 트럭을 '쁘띠 퀴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가 처음 대학에 갈 나이가 됐을 당시 바르샤바에서는 여성이 입학할 수 있는 대학이 없었다. 이에 그 당시 먼저 파리에 건너가있던 언니가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에게 제안하기를, 너 혹시 파리에 와서 공부해보는 건 어떻겠니? 근데 지금 우리 가족이 형편이 좀 어려우니 자리를 잡을동안 니가 폴란드에서 돈을 벌어 내가 파리에 자리를 잡을 수 있게 좀 도와줘라, 그럼 2년쯤 후에 니가 파리에 와서 공부할 수 있게 지원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의기투합하여 비록 가난하지만 결국 언니네 부부와 함께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여기서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는 당시 소르본 대학이라 불리던 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된다. 이때 교수의 심부름으로 그 학교에 없던 실험장비를 갖고 있는 과학자를 찾아가는데 이 사람이 이미 당시에도 상당한 연구성과를 내고 있던 피에르 퀴리였다. 피에르 퀴리가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에게 반해 논문을 선물하는 등 애정공세(?)를 펼쳤다는 얘기가 있다.

두 사람은 로맨스도 로맨스지만 과학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호흡을 보여준 협력 연구의 사례라고 평가 받는다. 결국 이 부부는 우라늄에서 방사능이라는 현상을 처음으로 '뭔가 이상한게 있다'면서 발견해낸 '베크렐'과 함께 3인 공동수상하게 된다. 베크렐은 현재도 방사능의 세기를 측정하는 단위로 남아있다. 그러나, 베크렐이 처음으로 뭔가 있다라는 걸 알아챈 걸로 인정받는 이 방사능이라는 것이 실제로 무엇인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를 밝혀내고 방사능(영어로는 radioactivity, 물론 처음엔 프랑스어로 만들었다)이라는 이름을 붙이기까지 한 것은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의 업적이다. 최초의 방사능 연구는 X선처럼 '필름'을 갖다대 놓고 뭔가가 나온다는 걸 알아내는 방식이었는데, 이것을 '전기'적인 방식으로 측정할 생각을 처음했고 또 그걸 실행해서 실제로 정확한 관측값을 얻어낼 수 있게 한 최초의 인물이 바로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다. 이전까지 화학 연구에서 전기적인 방법으로 측정을 해낸 사례는 드물었는데, 이때 이후로 화학 연구에서 전기적인 성질을 이용하는 실험 방식이 급속히 확산됐다고 한다. 이 실험 방법의 창안만 해도 화학계 전체에 엄청난 영감을 준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라듐을 발견하는 과정에서는 우라늄과 다른 돌들이 섞여있는 우라늄원석이라 할만한 물질을 8톤이나 가져다놓고 그걸 일일이 빻아가며 원소를 분리해냈다는 전설같은 일화가 기록으로 남아있다. 우연한 발견이 아니라 철저한 분석과 목적성 있는 실험, 게다가 그 목적을 위해 어마어마한 양의 길고 지루한 실험과정을 스스로 설계하고 선택하고 감내했다는 점에서 어느 모로 보나 존경스러울 뿐이다. 이 과정에서 남편인 피에르 퀴리 역시 그의 설계대로 함께 실험하며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이 라듐이라는 원소를 분리해낼 수 있다는 것이, 당시 방사능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게 했던 중요한 계기였다.

어느날은 가난한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가 냉난방은 고사하고 심지어 천장에서 비가 새는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그 8톤의 우라늄원석에서 일일이 원소를 분리하는 위대한 실험을 하고 있는 걸 알게 된 앙리 푸앵카레의 소개로 어느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화학을 가르치는 일자리를 얻게 된다. 근데 이때 무려 노벨상까지 수상한 위대한 화학자에게 화학을 배우는 행운을 얻은 학생들 중 많은 수는 이 기회에 감사하긴커녕, 그의 수업은 지루하고 프랑스어는 폴란드 억양이라 알아듣기 어렵다는 둥 트집을 잡으며 그의 프랑스어에 남아있는 폴란드 억양을 흉내내고, '그 폴란드 여자'를 놀리는 노래까지 만들어서 불렀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프랑스의 일차원적인 이주민 혐오 정서를 잘 보여주는 일화다. 그렇게 위대한 과학자 역시 이주민이고 여성이라는 것만으로 손쉽게 혐오의 대상이 됐던 것. 우리나라에서도 이주민을 볼 때 혹시 내가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를 보고 있는 건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한다.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는 노벨화학상과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는데, 노벨상을 두 번 받은 사람은 현재까지도 역사상 단 4명밖에 없으며, 심지어 화학과 물리학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개의 과학상을 한 사람이 받은 것은 아직까지도 그가 유일하다.(나머지 3명은 화학상/평화상, 물리학2회, 화학2회)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 가족들은 노벨상 역사에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기록을 남기는데, 남편인 피에르 퀴리,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 첫째 딸인 이렌 졸리오퀴리(결혼한 남편의 원래 성이 졸리오), 사위인 장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가 노벨상 수상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