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출판 이야기

[출판사 이야기] 샨티, 나, 그리고 99일. - 2 -

참참. 2013. 5. 22. 12:42


드디어 1월 28일 월요일, 첫 출근하는 날이 왔다. 샨티에서 월요일은 회의하는 날이다. 회의는 주로 오전에 한다. 첫 출근이다보니 회의는 건너뛰고 오후부터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점심을 먹고 한 시 즈음 샨티 사무실로 가니, 디자이너인 곤스 선배와 샨티의 공동대표이신 주간님이 밖에서 내가 쓸 책상을 손보고 계셨다. 없던 자리를 갑자기 만들어주시느라 고생하시는 모습들을 보면서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꼈던 것 같다. 여튼, 그렇게 해서 조그마한 책상 하나와 접이식 의자로 이루어진 '내 자리'가 생겼다. 책상 위에는 전화기가 놓였다. 컴퓨터는, 샨티 공동대표 중 나머지 한 분이신 평화님께서 노트북과 아이패드로 준비해주셨다. 왜 아이패드까지 필요했냐면, 문제의 노트북이 상당히 느렸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손을 보았다고 하시는데, 거의 수명을 다했다고밖에는 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가끔씩 하는 비교적 긴 문서 작성같은 걸 제외한 대부분의 일은 아이패드로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일이랄 게 없었다. 다들 자리에서 맡은 바 일을 하시는데, 내가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던 가운데 거의 처음으로 하게 된 일은, '샨티 도서목록'을 만드는 일이었다. 

샨티 도서목록은 이렇게 생겼다.

어떻게 만드는 것이냐하면, 우선, 저 종이들을 한 장씩 순서대로 모은다. 모은 종이뭉치에 펀치로 구멍을 두 개 뚫는다. 그럼 이제 적당한 길이로 자른 저 끈으로 묶는다. 길이가 남는 끈은 좀 잘라준다. 그럼 끝이다. 참 쉽죠?

마케터인 반지 누나가 도서목록이 모자라라서 만들어야된다고 하면서 친절하게 만드는 법까지 가르쳐줬다. 나는 처음에는 도서목록을 하나씩 하나씩 만들었다. 종이들을 모아서, 구멍을 뚫고, 끈으로 묶고, 다시 종이들을 모아서, 구멍을 뚫고, 끈으로 묶으면서. 나중에 주간님께서 지나가시다 웃으며 "일을 하나씩 나누어서 많이 해놓고 하면 더 편하고 빠르지 않을까?"라고 하셨다. 하하하하하하, 어째서 그때까지 그렇게 간단한 생각을 못했을까. 그 다음부터는 종이를 모아서 서른 세트 정도 만들어 쌓아놓은 다음에 한꺼번에 구멍을 뚫고, 그 다음에는 묶기만 하고, 그런 식으로 했다. 훨씬 편하고, 빨랐다. 윽.

저 끈으로 묶는 것도 은근히 예쁘게 안 된다. 특히 나는, 반지 누나가 말한 대로 그냥 일반적인 묶는 방법으로 두 번 묶는 방식을 선호했는데, 그렇게 하다보면 자꾸 끈 양쪽이 가로방향이 아닌 세로방향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렇게 세로로 되어있으면 뭔가 비틀린 것 같고, 예쁘지가 않았다. 왜 그럴까 고민하다보니, 내가 묶을 때 같은 방향으로만 두 번 묶어서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한번은 오른쪽 끈을 앞에 놓고 뒤로 돌려서 묶고, 한번은 오른쪽 끈을 뒤로 놓고 앞으로 돌려서 묶으니, 양끝이 아래위로 틀어지지 않고 좌우방향으로 얌전하게 놓였다. 그 뒤로 며칠동안 아침에 출근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한 시간 정도 도서목록을 만드는 일을 했다. 단순반복노동을 하다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는 걸 느꼈다. 도서목록을 만드는 건 언젠가 누군가는 해야하는 일인데, 잔뜩 만들어두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아직 뭘 해야할지 모르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어서 업무가 없는 나에게 그래도 뭔가 할 일이 있다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 일 말고 다른 할 일들은 서서히 조금씩 생겼다. 사실 샨티에서 매일매일 한 일들을 짤막짤막하게 수첩에 메모해뒀는데, 그 수첩을 4월 즈음에 잃어버렸다. 아쉽지만 이젠 어쩔 수 없으니 기억에 남아있는 것들만 글로 남긴다. 아마 그 다음으로 했던 일 중 하나가 당시 샨티에서 최근에 나왔던 책인 <우리는 크리스탈 아이들>과 <삶의 마지막 축제>를 읽고 짤막한 글을 써보는 거였던 거 같다. 별 기대하지 않고 '고도원의 아침편지'에 독자편지로 올렸다가 당첨이 되기도 했다.

샨티에 있으면서 가장 주요하게 했던 일 중 하나는, <내 아이가 사랑한 학교>에 대해 알리는 글을 올릴 만한 웹공간들을 찾는 일이었다. 주로 대안교육이나 발도르프 교육 관련 사이트나 카페 등이었다. 이건 꽤 오랜 기간에 걸쳐서 특별히 다른 할 일이 없을 때마다 했던 일이다. 백천재단과 함께하는 암환우를 위한 '사랑을 배우러 온 당신에게'라는 시리즈의 3권의 아이디어를 내는, 기획일도 달리 할 일 없을 때마다 계속 했던 일 가운데 하나다. 주로, 젊고 유쾌한 암환자들의 이야기라는 컨셉으로 접근하면서 '쿨한 백혈병 환자'로 이슈가 되었던 분의 블로그에도 자주 방문하고 그랬다.

<내 아이가 사랑한 학교>의 교정을 한번 보기도 했다. 상당히 기억에 남는다. 그동안 책을 읽으면서 나름 오탈자나 어색한 문장들이 자주 눈에 띄어서,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앉아서 펜을 들고 열심히 교정을 했는데, 이 정도면 아마 이제 별로 고칠 것도 없겠지라는 오만한 생각을 했으나, 진짜 오만한 생각이었다. 나중에 평화님께서 다시 한번 교정을 보시고나서, 몇몇 것들만 골라서 말씀을 해주셨는데, 상당히 많은 곳에서 진짜로 어색한 문장들이 많았다. 충격적이었다. 어째서 이게 눈에 띄지 않은건지 이해가 전혀 안 되는 것도 있었고, 내가 생각보다 의미만 통하면 대충 읽어서 넘긴다는 걸 알게 되었다. 교정이란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보통 3교 정도에서 최종교정지를 만들게 된다고 하던데, <내 아이가 사랑한 학교>는 미국에 계신 강성미 선생님과 이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교정만 거의 10번 가까이 간 것 같다. 물론 그 중에서 나는 위에 언급한 딱 한번 잠깐 본 것이 다이지만. 이 일은 나중에 <내 아이가 사랑한 학교> 책 앞에 독자교정으로 참여했다며 내 이름이 들어가게 되는 근거(?)가 된다. 그 몇 글자는 내가 샨티에서 잠깐 뭔가를 했었다는 가장 강력한 물리적 증거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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