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책읽기/바라는 삶을 위한 생각

<인간의 조건>, 한승태 - 디테일이 살아있는, 진짜 웃긴 노동현장 이야기

참참. 2013. 5. 21. 01:34


인간의 조건

저자
한승태 지음
출판사
시대의창 | 2013-01-03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안 해본 일이 없는’ 젊은 작가가 온몸으로 기록한 르포르타주!...
가격비교

굉장히 여러 사람으로부터 추천받은 책이다. 추천받은 책은 좋은 책일 확률이 높지만, 재미는 별로 없는 경우도 가끔 있다.
개인적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재미'가 있다는 건 (어떤 매체에서나 그렇겠지만)책에 있어서 굉장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종류의 책이 전부 그럴 수는 없다. 허나, 책에 좋은 내용이 담기면 담길수록 그 책이 널리 읽히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한다면, 재미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큰 동력이다. 재미가 있으면 그 책에 담긴 내용을 받아들이기도 훨씬 쉽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굉장한 책이다. 무지무지하게 암울하고 슬픈 대한민국의 사회 현실을 담고 있는데, 말도 안되게 재미가 있다. 일을 해도해도 계속 가난하고,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 절대 돈을 모으는 것과 직결되지 않는 워킹푸어의 현실을 직접 겪고 고발하는, 무겁다고도 할 수 있는 내용인데, 재밌는 소설 읽듯 다음 내용 궁금해하며 책장을 넘기게 한다.

책과 글쓴이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도 글을 쓰는 걸 좋아하고 글쓰는 일로 먹고 사는 일을 꿈꾸는 한 사람으로서, 글쓴이가 미친듯이 멋있어보인다. 보통 글을 써보고 싶다고 하면, 글쓰기 강좌를 듣거나 글쓰기 관련 책을 읽거나, 열심히 유명한 작가들의 책을 읽거나 할 것 같은데, 이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고시원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그동안 겪어본 직업이 꽤 여러 가지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1차, 2차, 3차 산업, 더 세밀하게는 농업, 어업, 축산업, 제조업, 서비스업계에서 모두 일해본다면 그때는 책을 한 권 써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렇게 했다.'(<인간의 조건> 저자소개 중에서) 하하하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진짜 멋지다.

그렇게 그는 꽃게잡이배에서 통발을 쌓던 이야기, 주유소와 편의점에서 동시에 아르바이트를 하던 이야기, 돼지 농장에서 똥꾼으로 일하던 이야기, 비닐하우스 오이 농장에서 일하던 이야기,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하던 이야기들을 직접 겪은 내용을 토대로 디테일하면서도, 몹시 재미있게 풀어놓고 있다. 그 일을 하면서 지낸 생활환경과, 그 일의 위험, 어려움, 고통스러움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일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과 그들이 서로 맺는 관계들에 대해, 또 자신조차 몰랐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까지. 더 이상 어떻게 설명을 해줄 수가 없네, 그냥 재밌다.


그 가운데 무척 인상깊었던 구절들이 있었다.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좋은 충고란 자신과 이웃에게 긍정적이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뿐이다. 누군가에게 충고를 건네고 싶다면 상대방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의미 있게 생각하는지부터 알아볼 일이다.(상대의 동의를 얻지 않고 충고하는 사람들을 법적으로 처벌하자! 모든 자기 계발서 저자는 사기죄로 구속되어야 마땅하다.) 만약 당신이 그런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면 충고할 자격이 없는 것이고 그런 삶을 살고 있는데도 상대가 당신을 좋은 충고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두 사람은 충고를 주고받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닌 것이다.'(205쪽)

그렇다. 정말 그렇다. 우리는 우리에게 충고를 해주고 싶어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매일 마주친다. 또,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자꾸만 충고를 하려고 한다. 충고란 어떠한 경우에도 거의 쓸데없는 일이라는 말은 다른 곳에서도 많이 접할 수 있는데, 이 책에서 글쓴이에게 충고를 하는 사람의 말 바로 뒤에 글쓴이가 이런 구절을 집어넣어서, 적절하면서 몹시 웃겨서 혼자 막 웃었다.

이 글 바로 앞에서 글쓴이에게 충고를 한 사람은 돼지농장에서 만난 조경과장인데, 그가 한 말은 이렇다.
'"승태 씨 봐요, 물론 지금이야 힘들고 뭣 같겠지만 조금만 참고 하면 돼요. 뭐든지 처음부터 너무 좋은 거 하려고 하지 말고 작은 거부터. 승태 씨, 지금 좋아요. 어디 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어디서든 열심히만 하면 돼요. 다 자기 마음먹기 달린 거지. 돼지들도 이쁘다, 이쁘다 하면 똥 냄새도 덜 난다니까."(중략)
"나는 똥 냄새를 어떻게 버텼냐고? 나야 뭐 버틸 게 없지. 난 이 일만 하면 돼요. 나 돈사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어요. 들어갈 생각도 없고. 어휴, 난 그런 거 절대 못해요. 나 여기 이사님한테 처음부터 확실하게 얘기했어요. 만약에 나보고 돈사 들어가서 일하라고 하면 나는 그 즉시 사표 쓸 거라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세상엔 이런 족속들이 있는 것이다. 자신은 손도 대고 싶어하지 않는 일을 다른 이들이 얼마나 쉽고 즐겁게 해낼 수 있는지 자신 있게 떠드는 사람들 말이다.'(204~205쪽)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소름이 돋을 정도이다. 비슷한 짓을 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충고란 건 되도록 자제해야겠다.

삶으로 먼저 보여주라는 의미에서 비슷한 구절인데,

'어렸을 적부터 지켜본 결혼생활이란 게 부부끼리 소리 지르고 욕하고 때리고 물건 집어던지는 것뿐이라면, 어떤 자녀가 결혼을 진지하게 고민하겠는가? 자녀들이 정말 결혼하길 바란다면 먼저 결혼이 의미 있는 삶의 방식이란 걸 증명해 보이는 것부터가 순서 아닐까?'(374쪽)

듣고보니 참 맞는 말이다.

'내가 보기엔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삐뚤어지게 만든다. 내가 경멸하는 사람은 황소 심줄 같은 끈기를 지닌 사람들이다. 참고 참아서 끝내는 어디선가 한자리 꿰차는 사람들. 그러니 너희들도 인생의 절반을 무의미한 일을 하며 살라고 권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 비하면 중도포기자들은 언제 어디서고 "이제 그만!"이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라 해야겠다. 참을성 좋은 사람들은 체면이니, 부모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명분에 충성을 다하는데,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건 여지없이 이런 부류다.'(234쪽)

참을성에 대한 다른 측면에서의 통찰이 참 신기하게 느껴졌다.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에 대해 괜히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걸, 나도 늘 해온 것 같다. 대놓고 욕하진 않더라도, 굉장히 좋지 않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 말을 듣고보니,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에게 맞지 않는 일을 그만두는 건 당연한 일이다. 참고 또 참으면서 자기 삶에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계속해서 하는 것, 그러고 그 결과로 뭔가 자리 하나 얻으면 그걸로 그게 옳았다고 믿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강요하는 것, 얼마나 자기 자신에게도, 옆 사람들에게도 폭력적인 일인가. 끔찍하다.

주유소, 편의점 알바를 할 때 '나는 어떤 종업원이 나에게 실수를 해도 절대 욕하지 말아야지' 다짐하던 지은이가 식당에서 국물이 옷에 약간 튀었을 때 기다렸다는 듯 욕을 하고, 자기가 그렇게 싫어하던 손님들처럼 행동했던 일에 대해 쓴 것도 무척 인상깊었다. 그것은 마치, 불가항력같았다고 하는 말이, 단순히 변명으로만 들리지는 않았다. 백화점이나 콜센터 등에서 이른바 감정노동을 하시는 분들에게 가장 진상짓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별로 대우받지 못하거나, 감정적으로 친밀한 인간관계가 별로 없거나, 다른 감정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섬뜩한 일이다.

글쓴이는 김민식pd님과의 인터뷰(http://free2world.tistory.com/638)에서, 그 힘든 일들 중에서 주유소, 편의점이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왜냐고 물으니, 다른 일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일이 끝나면 쉬지만, 감정노동을 하다가 모욕을 당하거나 상처를 입으면, 그 일이 집에 가서도 하루종일 생각난다고. 그래서 쉬는 시간이 없이 24시간을 계속 고통받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다. 허 참, 건장한 성인 남성이 몇 달 되지도 않아 그렇게 느꼈으니, 수많은 콜센터 노동자들, 백화점 노동자들이 우울증에 걸리는 것도 이해가 간다.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는데, 이렇게 일을 하며 쓴 책을, 이렇게 재밌게 읽고도 사지 않는다는 건, 내가 책과 글쓴이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내일 당장 책 사러 가야겠다.